촛불, '혁명적'이나 '혁명'이라 부르기엔 변한 게 없다

박찬수 2021. 3. 8.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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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수의 진보를 찾아서]박찬수의 '진보를 찾아서' _18
2016년 12월3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6차 촛불집회. 이 집회엔 전국에서 232만여명(주최 쪽 추산)이 참여해, 1987년 6월항쟁을 뛰어넘는 역대 최대 규모의 시위로 기록됐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촛불이 지향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2016년 가을과 겨울, 온 나라를 뜨겁게 달군 촛불 시위는 대한민국이, 한국 사회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달성하고 어떻게 변화하기를 바랐던 걸까. ‘촛불 정신’이라는 말로 한꺼번에 뭉뚱그리기엔 그 가치는 너무 넓고 제각각이다. 이제 열정의 구름을 걷고 좀 더 냉정하게 우리가 들었던 촛불의 의미와 한계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러려고 촛불을 들었나.”

요즘 쉽게 듣는 말이다. ‘촛불 정부’에 대한 비판은 진보와 보수, 여와 야를 가리지 않는다. “현 정부는 국민의 촛불을 빼앗아 자기 앞길만 밝혔다”는 국민의힘의 비판은 더는 새로운 게 아니다. 심상정 전 정의당 대표는 “촛불로 탄생한 정부에서 국민의 삶은 더 나빠졌다”고 말했고, 이진순 박사는 <한겨레> 칼럼에서 “4년 전 아스팔트 냉기가 등골을 타고 올라왔지만 추운 줄 몰랐다. 지금 이런 세상 보려고 촛불 든 게 아니다”라고 썼다. 비판은 밖에서만 오지 않는다. 집권세력 내부에서도 나온다.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은 최근 청와대에서 검찰개혁 속도조절론이 나오자 “촛불이 염원하는 건 그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촛불’에 관한 한, 촛불정부라 불리는 문재인 정부 처지는 사면초가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촛불이 지향했던 건 정말 무엇이었을까. 2016년 가을과 겨울 온 나라를 뜨겁게 달군 촛불 시위는 대한민국이, 한국 사회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달성하고 어떻게 변화하길 바랐던 걸까. 지금 촛불의 염원은 제대로 구현되고 있는 것일까. ‘촛불의 과제’ 또는 ‘촛불 정신’이란 말로 한꺼번에 뭉뚱그리기엔 그 기대와 가치가 너무 광범위하고 제각각이었던 건 아닐까. 4년여 전의 촛불을 다시 돌아보는 건 그런 맥락에서 의미가 있다. 이제 열정의 구름을 걷고 좀 더 냉정하게 촛불의 지향과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그래야 실망과 냉소가 아닌, 새로운 전진이 가능하다.

2016년 10월29일 저녁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1차 촛불집회를 알리는 공지문을 보면 “집회가 급작스럽게 잡히다 보니 시간, 장소에 대한 문의가 많다”는 구절이 나온다. 두번째 촛불이 타오르고서야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비상국민행동)이 결성될 정도로 시작은 갑작스러웠다. 비상국민행동 대변인을 지낸 안진걸 민생경제연구소장은 “첫 집회의 슬로건이 ‘모이자, 분노하자, 내려와라, 박근혜’였다. 박근혜 퇴진을 구호로 내걸었지만, 정말 탄핵까지 이어지리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준비 없이 타올랐지만, 확산 속도와 규모는 상상 이상이었다.

비상국민행동이 집계한 촛불집회 현황을 보면, 첫 집회부터 이듬해인 2017년 4월29일 23번째 집회까지 연인원 1685만명이 참여했다. 첫 집회의 5만명(주최 쪽 추산)은 두번째 집회에선 30만명으로 6배 늘었고, 세번째 집회엔 세배가 넘는 106만명이 참가했다. 최대 인원이 참여한 건 12월3일의 여섯번째 집회로, 전국에서 232만명(서울 170만명, 지역 62만명)이 동참했다고 주최 쪽은 밝혔다. 1987년 6월항쟁 규모를 뛰어넘는 역대 최대 규모의 시위였다. 순간 최대 운집 인원을 집계하는 경찰 추산(전국 43만명)과는 차이가 크지만, 잠깐 집회장을 다녀간 사람까지 집계하는 주최 쪽 계산이 꼭 틀린 건 아니다. 11월19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4차 집회에 주최 쪽은 60만여명, 경찰은 17만여명이 참석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조이코퍼레이션이 스마트폰 와이파이 신호 분석을 토대로 분석한 결과, 오후 2시부터 9시까지 광화문광장 주변 인파는 연인원 74만명으로 추산됐다. 단순 이동인구를 고려하더라도 비상국민행동의 참가자 추산이 전혀 엉뚱하진 않다는 얘기다.(<탄핵 광장의 안과 밖>, 이지호·이현우·서복경, 2017년)

참가 시민의 숫자는 중요하다. 이것이 탄핵 촛불을 ‘혁명’이라고 부르거나 또는 ‘혁명적’이라고 부르는 가장 뚜렷한 근거 중 하나가 된다. 2016년 촛불은 그 규모와 시민의 자발적 참여라는 측면에서 우리 현대사의 다른 어떤 운동도 뛰어넘는다. 2017년 5월의 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 유권자 조사에 따르면, 서울·인천·경기 등 수도권에 사는 응답자 가운데 촛불집회 참여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이는 전체의 19.6%였다. 다섯명 중 한명꼴이다. 2012년 동아시아연구원 조사에서 “평생 동안 정치 시위에 참여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는 응답이 12.1%였던 것과 비교하면, 이게 얼마나 높은 수치인지 금세 알 수 있다.(‘2016년~2017년 촛불집회의 정치적 항의’, 이재철, 2017년)

조직 동원이 아닌 시민의 자발적 참여가 돋보였고,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권력자를 끌어내리는 데 성공했다는 점도 촛불집회의 성격을 규정짓는 중요한 요소다. 안진걸 전 비상국민행동 대변인은 2016~2017년 상황을 ‘촛불혁명’이라고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1987년 6월항쟁은 민주화를 추구했지만 노태우 정권 탄생으로 귀결됐다. 그러나 촛불은 짧은 시기에 대통령의 탄핵을 이끌어내는 등 실질적 성과를 냈다”고 말했다.

1987년 6월항쟁의 규모는 촛불에 못 미치고, 결정적으로 정권 교체를 이뤄내지 못한 채 권위주의 통치를 연장했다는 한계를 지닌다. 반면에 헌법 개정을 했고, 절차적 민주주의와 인권의 획기적 개선의 계기를 마련했다. 노동운동의 폭발적 성장이 뒤따랐고, 남북·대미 관계에서도 새로운 접근을 시작했다. 그렇다면 2016년의 촛불은 한국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시민들의 엄청난 자발성과 에너지 분출은 분명 ‘혁명적’이었지만, 민주주의 회복과 정권 교체 외엔 뚜렷한 가시적 성과를 떠올리기 쉽지 않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2017년 2월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촛불집회엔) 정치적 분노뿐 아니라 사회·경제적 불만이 깊숙이 깔려 있다. 성장을 가져온 신자유주의 부작용을 실존의 차원에서 겪는 이들의 누적된 분노가 촛불의 동력이 됐다”고 말했다.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는 그해 8월 ‘6월항쟁과 11월촛불혁명’ 논문에서 “시민들이 단순한 박근혜 퇴진을 넘어 헬조선 탈피 등 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항쟁보다는 ‘시민혁명’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근본적 변화’ 의지가 어느 정도 강렬했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혁명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변한 게 없는 것처럼 보인다.

2017년 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의 유권자 조사엔 눈에 띄는 부분이 있다. 소득수준별로 촛불집회에 참여한 비율을 비교했는데, 월평균 소득 600만원 이상 고소득층에선 응답자의 25.7%가 참여했다고 답한 반면, 월 소득 199만원 이하 계층에선 3.3%만이 참여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촛불집회 참여도는 월 소득 300만원 이상에선 큰 차이가 없었다.(300만~399만원 21.5%, 400만~499만원 20.0%, 500만~599만원 22.4%, 600만원 이상 25.7%) 그러나 월 소득 200만~299만원 층에선 6.6%, 199만원 이하 계층에선 3.3%로 급격히 떨어졌다. 2016년 촛불집회가 중산층 이상이 주로 참여한 정치운동의 성격이 짙다는 걸 시사한다.

비슷한 경향은 서강대 조영호 교수의 논문(‘Who defends democracy and why? Explaining the participation in the 2016~2017 candlelight protest in South Korea’)에서도 확인된다. 이 논문을 보면, 촛불집회 참여에 강한 영향을 끼친 요소는 세대나 지역보다, 정치적 지향(진보 또는 보수)과 소득 수준이다. 특히 참여 동기는 계층별로 의미 있는 차이가 있다. 고소득 계층에선 ‘민주주의’와 ‘자유의 가치’가 주요 동기인 반면, 중산층에선 ‘사회적 불평등’과 ‘정치적 지향’이 좀 더 강력한 동기로 작용했다.

이는 ‘촛불 정신’이 얼마나 다양하게 제시될 수 있고, 또 얼마나 제한적일 수 있는지 보여준다. 냉정하게 보면, 촛불은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고 선거를 통해 문재인 정부가 탄생하는 순간 절반의 동력을 상실했다. 그래도 중산층 이하에서 제기한 ‘사회적 불평등’ 관련 요구를 문재인 정부가 얼마나 제대로 수렴했는가 하는 문제는 남는다. 촛불에 기반한 ‘다수의 지지’는 오래전에 끝났고, 정권이 잘해야 했다는 뜻이다.

비상국민행동 공동대표를 지낸 송주명 한신대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시민의 힘으로 합헌적으로 권력을 변화시키고, 그 과정에서 주권자로서 시민의 위상을 재확립했다는 건 큰 의미가 있다. 이건 해방 이후 오래 미뤄져왔던 이른바 ‘민주주의 혁명’의 지연된 완결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혁명으로서의 위상을 가지려면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민주공화국 가치에 동의하는 프로세스가 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2016년 촛불항쟁은 혁명적 요소와 씨앗을 잉태하고는 있었지만, 지금은 시민들의 집단 경험과 기억으로만 남게 됐다.”

※ 다음 회엔 ‘촛불은 무엇을 남겼나’ 두번째 이야기가 실립니다.



박찬수 선임논설위원. <한겨레신문>에서 정치부와 사회부·국제부 기자로 일했다. 국회와 청와대를 취재하며 ‘정치란 결국 권력 행사를 통해 사회를 바꾸는 것’이란 생각을 갖게 됐고, 그 점에서 어떻게 하면 권력을 제대로 올바르게 행사할 수 있을까에 관심이 많다. 청와대와 백악관의 작동 방식을 비교한 <청와대 vs 백악관>(2009년)과 1986년 태동한 민족해방(NL) 사조를 다룬 <엔엘(NL) 현대사>(2017년)를 펴냈다.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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