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정치권의 대책없는 훈수, 낯뜨거운 자랑

권오은 기자 2021. 3. 8.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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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재하려 노력했는데 자기 고집만 하고 잘 안된다. 말을 안 듣는다."

정세균 국무총리가 지난 7일 다시 한번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영업비밀 침해 소송과 관련해 빠른 합의를 강조했다. 정 총리는 유튜브 채널 ‘삼프로TV’에 나와 "(배터리 분쟁은) 국가적으로도, 회사에도 손실"이라며 "귀책 사유가 있으면 책임질건 책임지되 계속 법적으로만 끌고 가 싸우지 말고 빨리 합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두 회사간 합의는 정 총리의 말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두 회사가 원하는 합의금은 조 단위의 격차가 나고 미국국제무역위원회(ITC)의 판결문구 하나하나에 대해서도 해석차를 보인다. LG 손을 들어준 ITC의 결정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지도 지켜봐야 한다. 거부권 행사 여부에 따라 영업비밀 침해 민사소송이나 항소 등 법정 다툼이 이어질 수 있다. 미국을 넘어 유럽연합(EU) 등으로 확전될 가능성도 열려있다.

하지만 정 총리는 지난 1월에 이어 ‘빠른 합의 = 국가적 이익’이라는 단순한 논리만 반복했다. 정 총리는 또 "옛날 같았으면 총리가 그렇게 (합의하라) 했으면…"이라며 "지금 ‘합의하지 않으면 불이익이 있다’ 이런 이야기가 아니라 ‘제발 부탁드린다’ 당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사기업의 일에 아무런 책임감도 없이 감놔라 배놔라한다’ ‘얼렁뚱땅 넘어가라는게 정부의 대책이고 입장인가’라는 댓글이 이어졌다.

여권을 중심으로 기업 경영에 대책없이 훈수를 두는 일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앞두고 산재사고가 지렛대가 됐다. 산재사고가 발생한 포스코를 ‘살인기업’으로 지목한 뒤 최정우 회장의 사퇴를 주장하거나 택배기사 과로사 논란을 이유로 택배업체들에 연간 이익만큼의 고용과 투자를 주문하고 있다.

정치인들은 기업 성과를 자기 몫으로 돌리는 일에도 적극적이다. 박영선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는 ‘K-주사기’ 개발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시절 자신의 업적으로 선전하고 있다. 박 후보가 말하는 K-주사기는 전북 군산의 주사기 업체 풍림파마텍이 만든 ‘최소잔여형(LDS) 백신주사기’다. 정작 개발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던 것은 삼성그룹이었다. 금형제작이나 미국 식품의약국(FDA) 허가는 삼성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단기간에 해결이 어려웠다. 중기부의 지원도 분명 있었지만, 박 후보가 ‘삼성'을 지우고 자신의 이름만 내거는 것은 낯뜨겁다.

김영춘 민주당 부산시장 후보 역시 지난해 HMM이 창사 이래 최대인 9800여억원의 영업이익을 거둔 것은 ‘확신을 갖고 밀어붙인 해운재건 5개년 계획’ 덕분이라고 이야기했다. 김 후보는 자신의 소셜미디어(SNS)에 ‘저더러 미친놈이라 했지만 미친놈이 옳았습니다’라고 썼다. 물론 HMM이 정부의 재정지원에 힘입어 살아난 것은 사실이다. 초대형 컨테이너선을 확보한 것도 도움이 됐다. 그렇다고 김 후보가 장관에서 떠난 뒤 HMM이 얼라이언스(해운동맹)에 가입했고 지난해 컨테이너선 운임이 급등했던 사실 등은 제쳐두고 자신의 공으로만 돌리는 것은 볼썽사납다.

가장 심난한 것은 훈수도 두고, 숟가락도 얹지만 정작 해야할 제도적 뒷받침은 뒷전이라는 점이다. 오히려 규제 법안 처리에만 속도를 올린다. 이른바 공정경제 3법(상법·공정거래법·금융그룹감독법)과 노조법, 중대재해처벌법은 기업의 우려에도 강행처리됐다. 재계와 경제단체들이 우려를 전했지만 모두 묵살됐다. 이익공유제 등 반기업법이라고 평가받는 법안들도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한국경제연구원이 최근 매출액 5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신규 채용 계획을 조사한 결과 10곳 가운데 6곳이 채용 계획을 세우지 못했거나 아예 1명도 뽑지 않겠다고 했다. 기업들은 신규채용을 늘리기 위해 정부와 국회가 추진해야 할 정책으로는 ‘기업규제 완화’(35.2%)를 가장 많이 꼽았다.

이번엔 기업들의 호소가 받아들여질까. 이쯤되면 누가 자기 고집만 부리고 말을 안듣는지 곰곰히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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