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사는 젠더투쟁 교과서..하나둘 벽을 허물다

김양희 입력 2021. 3. 8. 08:06 수정 2021. 3. 8.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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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세계 여성의 날][젠더 평등을 위해 싸운 스포츠 선수들]
빌리 진 킹이 1973년 9월20일 휴스턴 애스트로돔에서 열린 테니스 대결에서 바비 릭스를 물리치고 양 팔을 버쩍 들어올린 모습. AP 연합뉴스

스포츠 역사는 젠더 투쟁의 교과서다. 여성은 종종 스포츠 종목에서 배척됐고 같은 종목을 하면서도 상금, 임금 등에서 많은 차별을 받아왔다. 오죽하면 초대 근대올림픽(1896년)에서 여성 참가자는 한 명도 없었을까.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이제 “남녀평등을 촉진하고 여성과 소녀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가장 강력한 플랫폼 중 하나가 스포츠”라고 말한다. 2017년 〈포춘〉 잡지 조사에 의하면 미국 내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의 65%(응답자 31명 중 20명)는 고교, 혹은 대학 시절에 운동선수였다고 한다. 운동을 한 여성이 그렇지 않은 여성보다 임금이 7% 높다는 조사 결과(2015년 ESPNW)도 있다. 스포츠 각계에서 여성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고 젠더 불평등도 조금씩 해소되고 있다. 테스토스테론 넘치는 스포츠 세상에서 젠더 평등을 이뤄낸 ‘게임 체인저’를 꼽아봤다.

캐서린 스위처, 보스턴 마라톤을 허물다

1897년 ‘애국자의 날’에 처음 시작된 보스턴 마라톤은 1960년대까지 여성의 참가를 공식적으로 금지했다. 보스턴 마라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마라톤 대회가 그랬다. “여성의 몸으로 42.195㎞를 뛰기에는 부적합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캐서린 스위처의 생각은 달랐다. 1967년 스위처는 성별을 숨기기 위해 ‘K.V.스위처’로 대회 출전 신청서를 낸 뒤 가슴에 261번을 달고 대회에 공식 참가했다. 그가 5㎞ 즈음 달렸을 때 스위처가 여성임을 눈치챈 한 대회 조직위 관계자는 거칠게 그를 대회장 밖으로 끌어내려고 했다. 이 모습은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겨 〈보스턴 헤럴드〉에 실렸고 이후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스위처는 꿋꿋하게 피투성이 발로 완주를 했다.

1972년부터 보스턴 마라톤은 여성 참가를 공식 허용했다. 뉴욕 마라톤이 여성에게 대회를 개방한 다음해였다. 하지만 여자 마라톤은 1984년 엘에이(LA)올림픽에서 첫 정식정목으로 채택됐다. 스위처는 〈엘에이(LA) 타임스〉와 인터뷰에서 “여성은 결코 남성보다 지구력과 체력에서 열등하지 않다”고 밝혔다.

빌리 진 킹, 최초의 성 대결에서 이기다

1973년 9월, 전 세계 9000만명 이상이 지켜본 세기의 테니스 대결이 펼쳐졌다. 빌리 진 킹과 바비 릭스의 남녀 성 대결이었다. 이 경기를 직접 보기 위해 3만472명이 운집했는데 이는 테니스 경기 관중 신기록이었다. 1940년대 세계 순위 1위였던 릭스는 평소 “여성 테니스 경기가 남성 경기보다 훨씬 열등하다”고 말해왔다. 그의 나이 55살이었지만 “여성 선수와 대결에서 이길 수 있다”고 떵떵거렸다. 당시 세계 1위 마거릿 코트를 2-0으로 이긴 뒤에는 기세가 더 등등해졌다. 릭스가 도발을 이어가자 그랜드슬램 단식에서 12차례 우승했던 30살의 킹이 나섰다. 결과는 킹의 3-0(6:4/6:3/6:3) 완승. 이와 더불어 여성 테니스를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졌다.

킹은 〈이에스피엔(ESPN)〉과 인터뷰에서 “경기에서 이기지 못하면 50년 전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경기가 여성 투어 대회와 여성의 자부심에 미칠 것으로 생각해 더 집중했다”고 밝혔다. 프로 선수로는 세계 최초로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밝힌(1981년) 킹은 지금도 성소수자와 여성 권익 신장을 위해 계속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의 끊임없는 노력은 이후 4대 그랜드슬램 대회 남녀 상금 평등화(2007년)까지 이끌어냈다.

1984년 엘에이올림픽에서 무슬림 여성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을 땄던 나왈 무타와킬이 2010년 3월 아부다비에서 열린 한 스포츠 시상식에서 상을 받고 환하게 웃고 있다. 아부다비/EPA 연합뉴스

무타와킬, 무슬림 여성의 희망이 되다

무슬림 여성의 스포츠 참여는 매우 제한적이다.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의 운동은 이단적으로 받아들여지고 히잡을 쓰고 다른 이들과 경쟁을 하기에는 어려움도 따른다. 일부 무슬림 국가에서 여성은 스포츠 관전조차 힘들다. 이런 환경에서 모로코 출신의 나왈 무타와킬은 1984년 엘에이(LA)올림픽에서 400m 허들 종목 금메달을 따내는 이변을 일으켰다. 무타와킬은 당시 미국 아이오와 주립대 학생이었으며 모로코 올림픽 대표팀 유일의 여성이었다.

무타와킬의 올림픽 금메달은 모로코인, 그리고 무슬림 여성 최초의 업적이었다. 단번에 그는 모로코의 영웅이 됐고 무슬림 소녀들의 로망이 됐다. 하시바 불메르카(알제리)도 무타와킬을 동경한 이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무슬림 극단주의자들에게 살해 협박을 받기도 했으나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때 조국에 남녀 사상 최초로 금메달(육상 1500m)을 안겼다.

세계육상연맹(IAAF)과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서 스포츠계 성 평등을 위해 노력해온 무타와킬은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상황이 바뀌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변화는 느리지만 저 너머에 있다. 때문에 우리는 계속 밀어붙일 것”이라고 했다.

레인 비칠리(호주)가 ​2006년 10월 하와이 마우이에서 열린 빌라봉 프로 ASP월드타이틀에서 서핑 묘기를 펼치는 모습. 마우이/EPA 연합뉴스

여성 서퍼들, 동등한 상금을 쟁취하다

여성 서퍼들은 오랜 기간 남성 서퍼들과 비교해 상금 면에서 많은 차별을 받았다. 종종 섹시한 이미지로 남성 서퍼의 들러리로 취급받기도 했다. 위험한 파도와 맞서는 것은 똑같았으나 돌아오는 것은 차별 대우와 끈적한 시선뿐이었다. 7차례 세계 대회 우승자 레인 비칠리는 2017년 〈가디언〉과 인터뷰에서 “19년간 상금으로 55만달러(6억원)를 벌었다. 가끔은 대회 중 숙소가 없어 보드 가방 위에서 잤으며 부상으로 받은 자전거 등을 팔아 다음 대회를 준비했다. 남녀 차별은 우리 세대에서 끝나야만 한다”고 했다. 대회 중 비키니를 입지 않아서 후원이 끊겼다는 레베카 우즈는 2016년 〈에이비시〉(ABC)에 “더 유명해지기 위해 알몸이 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며 한숨을 쉬었다.

2018년 6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주니어 대회에서 여성 챔피언이 남성 챔피언의 절반밖에 상금을 받지 못하자 여성 서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결국 세계서핑연맹(WSL)은 백기를 들었고 몇 달 후 남녀가 동일한 상금을 받게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비앙카 발렌티는 “어떤 사람들은 상금 재분배 문제 제기로 서핑 스포츠를 망치고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장차 서핑 스포츠계 전체가 성장할 것”이라고 했다.

이밖에 미국프로야구(MLB)에서는 첫 여성 단장(킴 응)이 나왔고 미국프로농구(NBA)에서는 여성 감독대행(베키 해먼)이 처음 공식 경기를 지휘했다. 올해 미식축구(NFL) 슈퍼볼에서는 여성 심판(사라 토마스)이 처음 등장하기도 했다. 스포츠 유리천장은 지금 이 시각에도 서서히 금이 가고 있다.

김양희 기자 whizzer4@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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