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만 해도 '저기 여군 지나간다' 수군거렸댔죠"
여군 첫 상륙함 함장 안미영 중령
군내 간부 중 여군 비율 7.5%뿐
함께 임관한 동기 절반 군복 벗어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게 힘들지만
남녀차별 군대만큼 적은 곳 없을 것"
한국 여군은 1950년 낙동강 방어선에서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던 즈음 부산에서 발족한 여자의용군 교육대를 모태로 한다. 이처럼 71년간의 오랜 역사를 자랑하지만, 여군은 창설 이후 한참 동안 활동 범위가 행정·간호 등 몇몇 비전투 분야로 제한되는 등 보조적인 위치에 머물렀다.
철옹성 같았던 성 역할 분담에 틈이 생겨나기 시작한 건 1990년대 말에 이르러서다. 1997년 처음으로 공군사관학교에 여생도 입교가 허용됐고, 육사와 해사가 뒤따랐다. 2002년엔 육군에서 첫 여군 야전부대 소대장이 배출됐고, 해군에선 첫 함정 근무자가 나왔다. 이듬해 공군에선 첫 여성 전투기 조종사가 배치됐다.
그로부터 약 20년의 기간이 지나는 동안 이제 여군은 야전부대 여단장(육군 대령)과 전투함 함장(해군 중령), 비행대대장(공군 중령)을 배출하며 남군과 함께 당당히 국토방위의 한 축을 담당할 만큼 성장했다.
여군들이 여기까지 오도록 어떤 어려움을 겪었을까. 앞으로 또 어떤 변화를 꿈꿀까. 20여년 전 개막된 ‘여군 시대’의 맨 윗세대인 안미영(40) 해군 중령을 3일 전화로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안 중령은 2003년 해군 학사사관(OCS) 과정을 거쳐 소위로 임관한 뒤 광개토대왕함 전투체계보좌관, 성인봉함 갑판사관, 3함대 32전대 321편대장, 해군본부 기참부 기지발전기획담당 등을 역임했다. 지난해 7월엔 성인봉함(2600톤급) 함장에 취임하면서, 여군 첫 상륙함 함장으로 주목받았다.
안 중령은 “처음 임관할 즈음엔 여군이 거의 없어서, 어딜 가도 주위에서 ‘저기 여군이다’ 하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는 어디서든 일하면서 조직 안에 자연스럽게 섞여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가 된 것 같다”고 격세지감을 토로했다. 실제 1999년 2085명으로 전체 간부의 1.4%였던 여군은 지난해 말 기준 1만3922명(간부의 7.5%)으로 늘어났다. 국방부는 2022년까지 여군 비율을 8.8%로 더 늘릴 계획이다.
안 중령은 왜 여군이 됐냐는 물음에 지체 않고 “어릴 때부터 군인이 좋았다”고 답했다. 해병대 출신인 아버지는 안 중령이 초등학생 시절 방학이면 매일 아침 깨워서 1시간씩 구보 훈련을 시켰다고 한다. 일찍 일어나는 것은 힘들었지만, 애초 군인이 될 운명이었는지 “그래도 좋았다”고 한다. 안 중령은 고등학교 졸업 뒤 사관학교 입학을 원했지만 ‘평범한 여자다운 길’을 가라는 부모의 반대에 부닥쳤다. 4년 대학 졸업 뒤에도 여전히 군에 대한 꿈을 포기할 수 없어 해군 학사사관 과정에 도전했다. 부모는 이번에도 역시 반대했지만 “내가 선택한 길을 가고 싶다”는 안 중령의 설득에 넘어갔다. 이제 부모는 딸이 군인이 된 것을 너무 자랑스러워한다.
여군이어서 겪은 차별이나 어려움은 없었을까. 안 중령은 “군대만큼 남녀차별을 느끼기 어려운 곳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군은 능력에 따라 인정받기 때문에 기회도 공평하다는 것이다. 안 중령이 지휘하는 성인봉함의 승조원 100여명 중 여군은 9명뿐인데, 대부분 남군이지만 지휘에 어려움은 없다고 한다. 안 중령은 “오히려 여성이어서 지휘에 더 유리한 면이 있다”며 “부하 수병들에게 엄마처럼 더 부드럽고 온화하게 접근할 수 있고 수병들도 잘 따른다”고 말했다.
그래도 군인 생활이 만만할 리는 없다. 임무가 많을 때는 한달에 보름 이상을 바다에서 보낸다. 주말이나 명절에도 비상대기해야 하는 등 긴장과 통제가 이어진다. 안 중령과 함께 임관한 여군 학사사관 동기 10명 중에도 벌써 5명이 군복을 벗었다고 한다.
안 중령은 특히 이제 여섯살인 딸과 남편 등 가족과 늘 떨어져 지내는 게 힘들다고 한다. 그는 “출산·육아휴직 1년을 빼고는 가족과 함께 산 적이 없다”며 “지금도 주말에만 남편이 딸을 데리고 내가 근무하는 진해로 와서 한번씩 본다”고 했다. 안 중령은 “며칠 전 딸의 유치원 입학식에도 못 가봐서 남편이 사진을 찍어 보내줬다”며 “그래도 딸아이가 엄마의 직업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줘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박병수 선임기자 su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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