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인과 5만평 광야 일구며, 기도하고 있죠”

평창/김한수 종교전문기자 2021. 3. 8.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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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산마루공동체 이주연 목사
강원 평창 산마루공동체의 대형 나무십자가 앞에 선 이주연 목사. 이 목사는 2019년 5월 이 십자가를 세운 것으로 시작으로 5만평 광야를 기도와 노동 공동체로 일구고 있다. /김한수 기자

“아직은 광야처럼 보이지만 이 땅을 노숙인 형제들과 함께 만들 겁니다. 기도와 노동이 하나가 되고, 치유되는 자리로.”

지난 2월 26일 강원 평창의 한 산기슭에서 만난 산마루공동체 이주연(64)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서울 공덕동 산마루교회를 담임하는 이 목사는 노숙인 사역으로 잘 알려졌다. 2006년부터 서울역 부근에서 노숙하는 이들을 돕기 시작했다. 매주 일요일 첫 예배는 노숙인 100여 명, 두 번째 예배는 일반 교인 100여 명이 출석한다. 노숙인 예배 후에는 아침 식사를 나눈다. 2017년 말엔 교회가 입주한 상가 건물 옆 칸에 노숙인을 위한 빨래방과 샤워실도 갖췄다. 위생과 ‘냄새’ 때문에 노숙인들의 자존감이 떨어지는 것을 해결해주기 위해서였다. 구제뿐 아니라 애썼던 부분은 노숙인 자활. 이를 위해 7년간 경기 포천에서 농장을 운영하며 노숙인들과 함께 염소·닭을 치고 채소를 길러 판매했다. 5년 전 농장이 문을 닫게 되면서 이 목사는 다른 곳을 물색하다 평창의 5만평 ‘항아리골’을 발견했다. “교인들과 함께 여러 후보지를 답사하다가 이곳 ‘항아리골’을 소개받았지요. 소리도 바람도 멈춘 듯한 이곳이야말로 기도와 노동을 통해 영성(靈性)을 수련하고 자활하기 딱 좋은 곳이지요.”

이주연 목사(가운데)와 김성배 부목사(오른쪽), 이한규 신학생이 산마루공동체의 밭 앞에 섰다. 이 목사 등은 2년간 밭 5000평을 개간했다. /김한수 기자

그는 이 땅을 만났을 때 ‘회개한 자들이 거(居)하는 거룩한 땅이 되게 하라’는 음성을 들었다고 했다. 실상은 잡목과 잡초가 우거진 사실상 광야였다. 이 목사는 2019년 봄부터 스스로 소매를 걷어붙였다. 가장 높은 곳에 통나무로 십자가를 세운 것을 시작으로 포클레인, 트랙터, 전기톱까지 사용법을 직접 배워 나무를 베어내고, 풀 뽑고, 돌 걷어내고 콩과 감자를 심었다. 노동에 익숙하지 않은 노숙인에겐 강요하지 않았다. “형제(노숙인)들은 이곳에 오면 일단 쉬게 합니다. 푹 쉰 다음에 ‘할 수 있는 만큼만 일하자’고 하지요. 자활보조비는 똑같이 나눴다. 1주일을 못 버티는 형제들이 많지만 그래도 어떤 이들은 2~3주씩 머물며 일하다 서울역으로 돌아가곤 했지요.” 이 목사도 주중엔 평창, 주말엔 서울로 오가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노숙인들이 쉴 통나무집을 만들기 위해 전기톱으로 목재를 다듬는 이주연 목사. 인건비를 아끼기 위해 이 목사는 트랙터, 포클레인, 전기톱 다루는 법을 배워 직접 한다. /김한수 기자

왜 기도와 노동일까. 이 목사는 “기도와 노동 모두 하나님께 다가가는 길”이라고 했다. “기도를 드리다 응답을 받게 되면 그게 고마워서 또 기도드리게 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사랑의 일치가 이뤄지지요. 노동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사회는 노동이 시장가치로만 평가받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을 가꾸는 일입니다. 기도와 노동은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길입니다.”

구체적으로 그는 5만평 곳곳에 밭과 꽃밭을 가꿀 계획이다. 콩, 감자, 맥문동, 금잔화뿐 아니라 약용으로 쓸 수 있는 식물을 자연친화적으로 재배한다. 또한 곳곳에 묵상을 위한 ‘에덴동산’ ‘게세마네동산’ ‘팔복(八福)동산’과 산책로, 작은 채플·미술관·도서관도 만들겠다는 장기 계획을 갖고 있다. 벌써 이곳으로 수련회를 오는 교회들도 있다.

지난 3월 1일 폭설이 내린 후 트랙터를 운전해 진입로 제설작업을 하는 이주연 목사. 공동체는 해발 700미터 고지에 위치해 제설작업을 비롯한 작업을 직접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이주연 목사 제공

이 목사는 젊은 목회자, 신학생 등과 함께 수도(修道) 모임도 시작했다. 노숙인들이 쉴 수 있는 통나무집 짓기도 시작했다. 궁극적으론 수도자, 젊은이, 노숙인 그리고 교인들이 함께하는 영적인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려는 것이다.

이 목사는 20년간 매일 아침 이메일로 독자들에게 보낸 ‘산마루서신’ 내용을 추린 책 ‘성령을 따라 걷습니다’(두란노서원)를 최근 펴냈다. 성령의 9가지 열매인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등 9가지 주제별로 나눈 묵상집이다. ‘하나님 안에서의 자유는/풍족한 삶만이 아니라/비천한 삶도 기꺼이 살아 내는 능력입니다’ 같은 묵상이다. 책 곳곳엔 평창 산마루공동체를 일구는 스토리도 털어놓았다.

이주연 목사가 20년 동안 매일 아침 이메일로 보낸 레터 '산마루 서신' 내용을 추리고 강원 평창 산마루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적은 신간 '성령을 따라 걷습니다'. /두란노서원

이 목사는 “젊은 시절 교수, 시인, 기독교 잡지사 편집장 등 다양한 경험을 하며 길을 찾았지만 매번 ‘이 길은 아니다’였다. 그러나 항아리골에선 ‘여기다’ 하는 주의 인도하심을 받았다”며 “이 골짜기에서 마지막 십자가를 지고, 기도와 노동, 문화와 예술, 가난한 이웃과 성숙한 성도 그리고 젊은이가 함께하는 영성 공동체를 이루고 싶다”고 말했다. /평창=김한수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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