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책무로 금융소비자 보호 '첫걸음'.."금융상품 피해분쟁 힘의 균형 찾게 돼"
[경향신문]
25일부터 ‘금소법’ 전격 시행
“사업자가 상품 피해 입증 책임
‘기울어진 운동장’ 소비자 불리
금융당국 원칙대로 역할 해야”
금감원 첫 여성 부원장 기록도
옷을 구입할 때는 입어본 뒤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환불이 가능하지만, 큰돈이 드는 무형의 금융상품은 그간 그럴 방법이 없었다. 오는 25일부터는 달라진다. 지난 10년간 지지부진했던 금융소비자보호법(금소법)이 전격 시행되며 금융 판매의 패러다임이 바뀐다. 2019년 금리 연계형 파생결합펀드(DLF) 불완전판매 사태, 2020년 라임·옵티머스 사태까지 대규모 고객 피해가 발생하자 금융상품 구매도 옷 구매처럼 ‘철회’가 가능하도록 하고, 피해 입증 책임도 사업자가 지도록 한 것이다.
금융감독원에서 소비자 보호의 최전선에 있는 김은경 금융소비자보호처장(56)을 지난 5일 만나 취임 1주년 소감을 들었다. 김 처장은 독일 만하임대에서 보험법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를 지내며 줄곧 소비자 보호를 강조해왔다. ‘유리벽’으로 비유될 만큼 여성 진입이 어려웠던 금융 영역에 ‘금감원 최초 여성 부원장’인 그가 등장하자 금융사들은 긴장했다.
금소법 시행에 대해 김 처장은 “국가의 책무로 금융소비자 보호를 언명한 게 핵심”이라며 “입증 책임을 사업자가 지게 되면서 소비자와 사업자의 힘의 균형을 찾을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예전처럼 고객들에게 기계적으로 서명하게 하면 금융사들이 마련 중인 ‘전면 녹취’도 의미 없을 수 있다. 성심성의껏 금융소비자 보호를 잘하는 회사가 살아남는 기로가 될 것”이라고도 내다봤다.
수조원대의 고객 피해에다 정치권 로비 의혹으로 번졌던 사모펀드의 분쟁조정과 제재는 아직 진행 중이다. 라임 무역금융펀드의 경우 민법상 ‘착오에 의한 계약 취소’라는 법리를 적용해 ‘100% 반환’이라는 첫 사례가 마련됐다. 김 처장은 “상품이 만들어지는 시점 자체부터 부실했던 것이니 중요한 착오가 있으면 계약 취소가 가능하다는 법리”라며 “세 차례 법률 검토를 거치면서 금융사들에 ‘논거를 뛰어넘기 어려우니 로펌 매출만 올려주지 말라’고 할 정도로 자신이 있었다”고 말했다. 금소처는 손해가 확정되지 않더라도 금융사와 고객이 사후 정산하는 방식으로 합의하면 분쟁조정위원회가 받아들이는 모델도 만들었다. 기존에 피해자들이 손해를 확정할 때까지 5~6년 기다렸던 관행을 고친 것이다.
제재심에 출석해 선제적으로 소비자 보호를 하기 위해 노력하고 분조위 결정을 수용한 회사들에 대해서는 의견을 제출하기도 했다. 김 처장은 “사업자도 돈이 생겨야 돌려줄 수 있으니 피해구제를 빠르게 할 수 있는 상생 구조를 만들려고 한다”고 말했다.
소액분쟁 사건에 대한 분쟁조정 결정에 대해 금융기관은 다툴 수 없도록 하는 ‘편면적 구속력’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서는 “기업이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한다는 옹색한 논리는 이미 주요국에서 다 깨졌다”며 “공익 목적이 중요할 경우 등 기본권을 해하지 않는 측면에서 편면적 구속력을 쓸 수 있는 기준이 나와 있다”고 말했다. 독일의 경우에는 여기에서 나아가 협회 단위의 분쟁조정회의체인 옴부즈맨제도를 운영한다. 독립성을 보장받고 1년마다 백서를 발표해 국민들에게 평가받는다. 영국·오스트리아 등에서도 이 제도를 벤치마킹했다.
금융상품이 복잡해지면서 사고가 터질 경우 규모도 커지고 있지만 금융감독 인력은 여전히 부족하다. 한국 소비자보호처는 300여명이지만 영국은 5000여명이다. 김 처장은 “물건을 만들어 파는 산업자본주의 시대와 달리 금융자본주의 시대에는 잘못하면 약자 주머니에서 돈이 나와 부자에게 갈 가능성이 높다”며 “당국은 원칙에 따라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하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금감원 첫 여성 부원장인 그는 지난 1년간 주요 회의석상에서 홀로 여성이었다. 그는 “처음엔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조심스럽고 어려웠지만 한 직원이 ‘처장님 오시고 올라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고 말해줘서 용기를 얻었다”며 “원칙과 정의에 부합하며 일 잘하는 모델이 될 수 있다면 후배 여성들을 위해서도 참으로 기쁜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임아영 기자 laykn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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