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모하다고들 하지만 '한국문학' 중심 잡아보려 창간했죠"

최재봉 2021. 3. 7.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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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짬] 소명출판 박성모 대표

소명출판 박성모 대표가 2일 오후 서울 마포의 한 카페에서 만나 문학 계간지 <문학인>을 창간한 계기를 들려주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문예지 시장은 진화와 멸종의 생태계 또는 이어달리기 경주 같다. 기존 잡지가 사라진 자리에 새 잡지가 들어선다. 지난해 <시인동네>가 문을 닫고 <에픽>이 창간되었으며, 올 초에는 <문학3>이 무기한 휴간에 들어갔다. 2021년 봄호로 창간된 계간 <문학인>은 그 생태계 또는 이어달리기의 가장 최근 주자라 할 수 있다. 국문학 전문 출판사인 소명출판이 발행을 맡았다. 1998년 출범한 소명출판은 묵직한 연구서와 비평서, 총서 등을 중심으로 연 80~100종의 도서를 출간하고 있다. 두툼하고 촘촘한 반년간지 <근대서지>를 내며, ‘임화문학예술상’을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지난 2일 오후 한겨레신문사에서 박성모 소명출판 대표를 만나 <문학인> 창간 배경과 계획을 들었다.

계간 ‘문학인’ 2021년 봄호로 창간
학술 성격 전문출판사로 23년째
문예지 줄줄이 폐간중에 이례적
“돈·여유 아니라 소명으로 할 일”

원주에서 문명 날리던 ‘소년 시인’
“최근 뇌종양 겪어 늦기 전에 시작”

계간 ‘문학인’ 창간호 표지. 소명출판 제공

“오랜 전통을 지닌 문예지들이 속속 없어지는가 하면 신뢰하기 어려운 문예지들도 늘고 있어요. 문학이 오락이나 게임으로 변질되는 느낌도 없지 않습니다. ‘문학 고유의 영역’이라는 말을 하면 구태의연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겠지만, 무언가 무질서하고 방만한 상태를 정리하고 중심을 잡을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가 몸도 안 좋고 나이도 적지 않은 만큼, 더 늦기 전에 시작하자 싶었어요.”

박 대표는 “기존의 대형 문학 출판사들도 잡지에서 손을 떼는 마당에 소명출판 같은 작은 출판사가 새로 문예지를 창간한다고 했더니 무모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며 “결코 돈과 여유가 있어서 잡지를 내려는 건 아니고, 소명출판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용기를 냈다”고 고백했다.

박 대표는 강원도 원주에서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시를 썼다. “원주에서는 문명을 날렸다”고 했다. 대학 국문학과와 대학원 박사과정까지 수료하고 논문을 준비하던 중, 지도교수이던 문학평론가 구중서 교수가 정년퇴임을 하게 되자 “미련 없이 그만두었다.” 우연한 계기로 출판 편집 일을 하게 되어 4년 남짓 편집자로 일하다가 그만두고, 서너 달 유예를 거쳐 소명출판을 창립했다. 1998년이었다.

“출판사를 처음 시작할 때에도 무모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죠. 학술서 성격의 책에 어울리지 않는 고급 종이를 쓰고 디자인에도 파격적일 정도로 신경을 썼으니까요. 오죽하면 미친놈이라는 말까지 들었겠어요?”

그러나 소명출판이 문학 연구자와 평론가들 사이에 존재감을 확실히 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문학인>의 편집인을 맡은 문학평론가 유성호 한양대 교수와 편집위원들은 그간 소명출판이 연구자·평론가들 사이에 확보한 신뢰와 기대 그리고 너른 네트워크를 보여준다. 국문학 전공 평론가인 이경수·이경재 교수와 영문학자인 오길영 교수, 일문학자인 손지연 교수, 한·베트남비교문화 전공인 최빛나라 연구원, 영화사가 한상언 박사 등 다양한 분야 전문가들이 편집위원진을 이루었다.

“<문학인>이 한국에서 발행되고 한국문학을 주로 다루는 문예지이긴 하지만, 한국문학만을 대상으로 삼지는 않을 겁니다. 한국문학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도 동아시아 문학과 문화 전반을 다룰 수밖에 없기도 하고요. 또, 영화와 문학을 결합시키는 작업에도 큰 관심을 지니고 있습니다. 편집위원들뿐만 아니라 필자로 참여한 선생님들 역시 일종의 네트워크 안에서 각자의 역할을 해주실 거라고 기대합니다.”

<문학인> 창간호는 ‘비평의 존재방식’을 특집 주제로 삼아 고봉준·이경수·김미정 세 비평가의 글을 실었다. 리뷰 코너에는 오길영·유성호·이경재·곽형덕 네 필자의 글을 실었고, 한상언 박사가 영화감독 장선우를 인터뷰한 꼭지와 일제강점기에 나온 <대경성사진첩>의 여관·호텔편 사진자료와 그에 대한 설명도 만날 수 있다. 여느 문예지처럼 신작 시와 소설도 청탁해 실었고, 권성우·김희숙·서정 세 필자의 산문 역시 창작난을 장식한다. ‘정전의 재발견’이라는 난을 두어 들뢰즈 철학과 이효석 단편 ‘산협’을 다시 읽기도 한다.

“‘정전의 재발견’은 우리 출판사의 색채에 어울리는 기획이죠. 이효석 하면 ‘메밀꽃 필 무렵’만 알지 ‘산협’을 들어본 독자는 많지 않을 겁니다. 이번에 기획에 넣느라 원문을 확인해 보니까 기존 판본들에 오류가 많더군요. 그렇게, 잊힌 작가와 작품 그리고 이론을 다시 보게 하는 동시에 정전화 작업에도 기여하자는 취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산문의 비중을 아주 크게 보는데, 시나 소설의 잉여물이 아니라 좋은 산문을 쓰는 필자들을 적극 발굴할 생각입니다.”

박성모 소명출판 대표는 일찌기 시를 쓰기도 하고 문학비평을 전공한 문학인 출신이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박 대표는 “소명출판은 <문학인> 창간을 계기로 시와 소설, 산문 등 단행본도 출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 하나의 그저 그런 잡지가 나왔다는 오명이나 누명은 쓰고 싶지 않습니다. 정말 제대로 해보고 싶어요. 제가 2018년에 뇌종양으로 쓰러져서 수술을 받고 지금도 약을 먹고 있는데, 그래도 이만하기가 다행이라 생각해요. 잡지로 수익 볼 생각은 전혀 없고, 일단 시작했으니 내 몸이 소진할 때까지 하겠다는 게 제 스타일입니다. 소명출판이 맨손으로 시작해서 여기까지 왔듯이, <문학인>의 앞날도 기대해 주셔도 좋습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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