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자비가 불탄' 내장사의 비극

정성환 호남본부 기자 2021. 3. 7.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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숯덩이가 된 대웅전..모여든 신도들 "비통한 마음"
고개숙인 사찰 측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어"
"서운해 방화라니..가사만 걸친 중생에 다름없어"

(시사저널=정성환 호남본부 기자)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되지 절이 뭔 잘못이야. 절간에 틀어 앉아 싸움질이나 하나." 

전북 정읍에 사는 불교 신도 이 아무개(여·71)씨의 장탄식이다. 천년고찰 내장사에는 지난밤 대웅전이 모두 불에 탔다는 비보를 접한 불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이곳에 머물던 승려의 소행으로 대웅전은 전소됐다. 신도들은 순식간에 사라진 정신적 위안처의 허망함에 몸서리 치고, '서운해서 불 질렀다'는 수행승의 어이없는 변(辯)에 할 말을 잃었다.

이씨는 "출가한 승려들이 수양에 정진해도 모자랄 판에 절간에 눌러 앉아서 싸움질이나 하고 있는 것 같아 비통하다"며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전주에서 한걸음에 달려왔다는 60대 중반의 한 여성 불자는 불에 탄 기둥을 붙잡고 연신 흐느꼈다. 

전북 전주에서 비보를 듣고 한걸음에 달려왔다는 한 여성 불교 신도가 불에 탄 기둥을 붙잡고 흐느끼고 있다. ⓒ시사저널 정성환

6일 오전 찾아 간 내장사 경내 화재 현장. 전날 오후 불에 타 웅장했던 대웅전은 온데간데없고, 대신 처참한 모습을 드러냈다. 나송 재질의 아름드리 기둥들은 시커멓게 탄 채 숯덩이가 돼 나뒹굴고 있었고, 부처님을 모셨던 자리는 깨진 기와지붕과 검붉은 흙이 대신 차지하고 있었다. 신자들의 소망이 써진 기와도 산산조각 나 바닥에 팽개쳐져 있었다. 바닥은 화재 진화를 위해 뿌려진 물로 신발이 빠질 정도로 진흙탕을 이루고 있었다. 

여전히 건물 터 여기저기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며, 메케한 냄새를 뿜어 내 화재의 참상을 실감케 했다. 대웅전이 있던 자리 바로 뒤 편 내장산 자락의 초목도 그을려 있었다. 자칫 대형 산불로 이어질 뻔한 아찔한 순간을 소방당국의 빠른 대응과 진압으로 겨우 모면했다. 바로 옆에 설치 된 소화전 옆으로는 소방호스가 어지럽게 펼쳐져 있어 당시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를 헤아릴 수 있었다.

내장사는 이날 오전만 해도 인적이 드물어 적막감마저 감돌았다. 백련암 쪽에서 아침 운동을 마친 일부 정읍 시민들이 밤사이 뉴스를 듣고 확인차 들렸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화창한 날씨 속에 정오가 지나면서 가족단위 나들이객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이들은 화마가 덮친 현장을 훑어보며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며 안타까워 했다. 광주에서 온 한 관광객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면서 "그나마 대웅전 바로 뒤 내장산 산불로 번지지 않아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 내렸다. 

일부 승려의 몰지각한 태도와 안이한 사찰관리를 꾸짖는 성난 목소리는 침잠하던 절 마당을 뒤흔들었다. 정읍 한 시민은 "출가자가 동료 스님과 불화로 수행도량에 불을 지른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 일이다"며 "20~30년 수행에 깨달음이 도로 아미타불 됐으니 가사만 걸친 중생에 다름없다"고 꼬집었다.

3월 6일 오후, 전북 정읍 내장사에서 내방객들이 전날 오후 승려의 방화로 불에 타 잿더미로 변한 대웅전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지켜 보고 있다. ⓒ시사저널 정성환

지난 2012년 전기 누전 화재로 소실된 대웅전을 정읍시가 25억원을 투입해 복원할 당시 참여한 적이 있다고 자신을 소개한 김아무개(71)씨는 "이번 화재는 내장사 승려가 술 먹고 방화한 사실이 백일 하에 드러난 만큼 조계종이 건축물 재건에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와 관련, 사찰 한 관계자는 "다른 절을 떠돌던 A씨가 이곳에 온건 불과 3개월 전으로 내장사에 들어오길 요청해 받아들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A씨가 불을 질러놓은 이후에 자신의 방 앞에서 태연하게 웃고 있는 것을 여러 사람이 봤다고 한다"며 "최근들어 부쩍 이상한 행동을 한 점을 보면 동료 스님들부터 부당한 일을 당해 불을 질렀다는 말은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덧붙였다.

결이 다른 말도 나온다. 내장사의 한 가게 주인은 "A 스님은 참 선한 분이라는 인상을 지니고 있었는데, 막상 방화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며 "지난 1월 초 폭설이 내렸을 때 묵묵히 절 마당을 쓰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고, 설마 악한 마음으로 그런 일을 했을까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찰 측은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죄송하다고 거듭 사과했다. 내장사 관계자는 "부처님을 지키지 못했으니 참으로 부끄럽고 죄송하다"며 "특히 수행하는 스님이 불을 질렀으니 입이 열개여도 할 말이 없다"고 고개를 숙였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본사 선운사 주지인 경우스님도 6일 "국민과 사부대중 여러분께 비통한 마음으로 참회드린다"고 사과했다. 

호남의 대표적 고찰 중 하나인 내장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으로 고창 선운사가 관장하는 말사(末寺)다. 경우 스님은 "화재 배경이 사찰 내부 대중의 방화로 알려졌다"며 "출가수행자로서 고의로 방화를 한 행위는 그 무엇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라고 밝혔다.

5일 오후 승려의 방화로 불에 타 잿더미로 변한 내장사 대웅전. 대웅전 뒷산 숲까지 불과 10여m 정도를 남겨 둔 지점까지 불에 그을린 자국이 선명해 자칫 대형 산불로 이어질 뻔했다. ⓒ시사저널 정성환

내장사 대웅전은 5일 오후 6시 30분쯤 불이 나 전소됐다. 지난 2012년 화재로 불에 타 복원한 지 9년 만이다. 이날 화재로 내장사 대웅전(165.84㎡) 전체가 전소돼 소방서 추산 17억여원의 재산피해가 났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 또 내장사 경내에 있는 조선동종 등 문화재와 함께 천연기념물 제91호인 '내장산 굴거리나무 군락'도 무사했다.

정읍경찰서는 6일 저녁 내장사 대웅전 방화 피의자인 승려 A(53)씨를 현주건조물방화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A씨는 방화 5분 뒤 경찰에 전화를 걸어 태연하게 "대웅전에 불을 질렀다"고 신고했다. 신고 이후 도주하지 않고 거처이자 수행 공간인 향적원 마루에 앉아서 웃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체포 당시 술을 마신 상태였다. A씨는 3개월 전 수행을 위해 내장사에 들어 왔다. 경찰 조사에서 "함께 생활하던 스님들이 서운하게 해 술을 마시고 우발적으로 불을 질렀다"고 진술했다. 

내장사가 화마에 휩싸인 것은 이번이 네 번째다.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때 완전히 불탔다가 중건되기를 반복했고, 2012년 10월 전기 누전으로 불에 타 전소됐다. 정읍시는 2015년 시민 성금과 예산 등 25억원을 들여 대웅전 건물을 복원했지만 이번에 다시 잿더미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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