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억 그림 남긴 김환기, 넥타이공장서 일한 사연

조성준 2021. 3. 6.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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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예술가의 사회-71] 김환기 (화가, 1913~1974)

김환기 화백과 그의 아내 김향안.
◆ 국내 고가 미술품 10위중 9위는 김환기

키가 190㎝에 가까웠던 화가는 한껏 움츠린 채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림을 팔지 않기로 했다. 팔리지가 않으니까 안 팔기로 했을지도 모르나 어쨌든 안 팔기로 작정했다." 이 화가는 파리 유학을 앞두고 있었다. 그림을 팔아 유학 경비에 보태려 했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그림은 좀처럼 팔리지 않았다. 화가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반세기 후 자신의 그림이 한국 미술품 중 가장 잘 팔리는 작품이 되리라고는. 화가 이름은 김환기다.

국내 미술품 중 최고가 작품은 김환기 화백의 '우주'(1971)다. 이 그림은 2019년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132억원에 낙찰됐다. 종전 최고가는 85억원에 팔린 '붉은색 전면 점화'(1972)였다. 이 그림도 김환기 작품이다. 국내 미술품 가격 상위 10점 중 9점이 김환기 그림이다. 사실상 김환기와 김환기의 싸움이다. 무엇이 그를 한국 미술 황제로 만들었을까.

132억원에 낙찰되며 국내 미술품 최고가를 기록한 작품 `우주`(1971). <환기재단>
◆ 섬마을에서 태어난 소년

김환기는 한국에서 태어나 일본과 파리를 거쳐 뉴욕에서 눈을 감은 화가다.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은 쪽빛 바다 곁에서 시작했다. 김환기는 1913년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도라는 섬에서 태어났다. 대지주였던 아버지 덕분에 유복한 환경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소년은 바위에 걸터앉았다. 눈앞에 바다가 펼쳐졌다. 살가운 미풍과 따스한 햇볕을 맞으며 푸른 바다를 그렸다.

김환기는 일찍 그림에 소질을 보였고, 화가라는 꿈을 꿨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시절이었다. 한국에서 제대로 미술을 배울 길은 없었다. 이중섭, 천경자, 나혜석, 이쾌대처럼 이 시기에 붓을 잡은 예술가 대부분은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김환기도 19세에 일본으로 갔다. 1933년 니혼대 미술부에 입학했다. 당시 일본에는 유럽 미술이 썰물처럼 들이닥쳤다. 유럽의 초현실주의, 입체주의 화풍에 영감을 받은 젊은 화가들은 새로운 회화를 꿈꾸며 심기일전했다. 김환기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일본에서 추상화를 그리는 화가들과 어울렸다. 금세 두각을 드러냈다. 권위 있는 미술전에서 '종달새 노래할 때'(1935)라는 그림으로 입선했다.

'종달새 노래할 때'는 소녀가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있는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소녀 등 뒤에는 푸른 바다가 슬며시 보이고 하늘엔 구름이 있다. 김환기가 도전했던 미술전은 실험적인 작품이 겨루는 무대였다. 그는 고민 끝에 고향을 선택했다. 자신이 태어나 자란 섬마을이야말로 상상력을 발휘해 그리기 좋은 주제였다. 김환기는 고향 풍경과 그곳에 두고 온 여동생을 향한 그리움을 꾹꾹 눌러 담아 이 그림을 그렸다. 이렇게 김환기의 예술 여정이 시작됐다.

일본 유학시절에 그린 `종달새 노래할 때`(1935). 이 그림으로 일본 미술전에서 수상했다. <환기재단>
◆ 시인 이상과 화가 김환기의 여자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현실조차 예술가 영혼을 꺼트리진 못했다. 1930년대 서울 뒷골목에는 마치 파리 몽마르트르처럼 가난한 예술가가 몰려들었다. 그들은 다방이나 술집에서 머리를 맞대고 싸구려 술을 마시며 시, 소설, 그림을 주제로 토론했다. 이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 천재 시인 이상이다. 그러나 천재는 단명했다. 1937년 이상은 겨우 27년을 살고 폐결핵으로 눈을 감았다. 그에게는 결혼한 지 석 달밖에 안 된 아내 변동림이 있었다. 변동림은 당시 이화여대를 졸업한 엘리트였고, 작가로 활동했다.

이상이 사망한 해에 김환기는 일본에서 고국으로 돌아왔다. 일본에서 인정받고 온 그는 금세 주목받았다. 1941년 개인전까지 열며 서서히 날개를 폈다. 김환기는 일본 유학을 떠나기 전에 결혼했었다. 아버지 강요로 잘 알지도 못하는 여성과 맺은 혼인이었다. 1942년 김환기 부친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유산을 미련 없이 소작농에게 나눠줬다. 그리고 사랑 없이 결혼한 아내에게 위자료를 주고 이혼했다.

김환기는 한 시인을 통해 변동림을 소개받는다. 한쪽은 이혼, 한쪽은 사별이라는 아픔을 공유한 둘은 그렇게 만났다. 1944년 김환기와 변동림은 결혼했다. 변동림은 남편 성을 따라 김향안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만약 김향안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김환기라는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김향안은 김환기 그림이 만개하도록 도운 일등 공신이다.

한국전쟁 시기에 그린 `판잣촌`(1951). 전쟁에 지친 고단한 삶을 따뜻한 색채로 담아냈다. <환기재단>
◆ 교수직을 버리고 파리로 갔다

1945년 대한민국은 해방을 맞이했다. 1년 후 김환기는 서울대 미술대 교수가 됐다. 신사실파라는 미술 단체를 만들어 예술운동을 주도했다. 신사실파가 추구했던 그림을 딱 잘라 설명하긴 어렵지만, 주로 서양 추상화에 영향을 받은 화가들이 김환기 주변에 모였다. 그중엔 이중섭도 있었다. 일본 유학 시절만 해도 김환기는 마치 몬드리안처럼 기하학적인 추상화를 자주 그렸다. 고국에 돌아오고 난 후에 그의 그림에는 한국적인 요소가 전면에 등장했다. 특히 백자의 은은한 미학에 푹 빠졌다. 돈이 생길 때마다 백자 항아리를 사 모았다. 그는 백자를 소재로 많은 그림을 남겼다. 세잔이 사과를 관찰하고 또 관찰하며 위대한 그림을 창조했듯이, 김환기도 오랜 시간 백자를 어루만지며 자신만의 조형 언어를 구축했다.

백자 외에도 이 예술가에게 영향을 준 건 그리움이었다. 고향을 떠난 자들의 숙명답게 김환기도 평생 향수에 시달렸다. 그는 유년 시절 눈앞에 펼쳐졌던 쪽빛 바다를 그리워했다. 모든 풍경이 느릿느릿 흘러갔던 어린 시절 평온함을 떠올리며 서글펐다. 그의 그림에는 고향 바다 푸른색이 자주 등장한다. 미술계에선 이 색을 '환기 블루'라고 부른다.

1950년 6·25전쟁이 터졌다. 김환기는 종군 화가로 활동했다. 전쟁이 길어지자 김환기는 부산으로 피란을 왔다. 예술가들은 전쟁에도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극을 초월하기 위해 더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전쟁 중 부산에서 열린 미술 전시회는 100건이 넘는다. 김환기도 붓을 놓지 않았다. 동료 화가 집 다락방에서 지내던 그는 피란 수도 부산에서도 전시회를 열 만큼 끈질기게 그림을 그렸다. 이 시기에 그린 '판잣집'(1951)은 전쟁이라는 비극을 기록한 작품이다. 전쟁통에 판자촌에서 살아가는 고단한 사람들을 그린 작품이지만, 색채는 따뜻한 봄날처럼 맑다. 화가의 온화한 시선이 느껴진다. 최악의 순간에도 김환기는 언젠간 찾아올 봄을 상상하며 이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1952년 김환기는 서울대에서 홍익대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1년 후 전쟁은 끝났다. 아내 김향안이 김환기 마음에 불을 지폈다. "파리에 가보는 게 어때요?" 김환기가 일본 유학 시절에 접한 미술은 모두 파리에서 건너온 것들이었다. 아내의 설득으로 그는 현대미술 수도 파리로 건너갈 계획을 세운다. 1955년 김향안이 먼저 파리로 떠났다. 그는 남편을 위해 파리에서 미술 평론을 배우고, 미학을 공부했다. 화상들과도 친분을 쌓았다. 그렇게 터를 닦아 놨다. 1956년 김환기는 교수직을 포기하고 아내가 있는 파리로 향했다.

파리 유학시절에 그린 `매화와 항아리`(1957). <환기재단>
◆ 점점 '점'으로 향했다

김환기는 파리에서 3년간 체류했다. 그는 루브르박물관조차 가지 않았다. 위대한 작품에 압도돼 자신의 색을 잃어버릴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몸은 파리에 있었지만, 그의 그림엔 한국적인 정서가 더 짙어졌다. 여전히 백자와 매화를 그렸다. 파리에서 김환기는 개인전을 몇 차례 열었다. '환기 블루'로 불리는 신비로운 푸른색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그만큼 고향을 그리워했다는 의미다. 모든 재산을 이 유학 비용에 쏟아부었기에 부부는 생활고에 시달리기도 했다. 1959년 김환기는 고국으로 돌아왔다. 홍익대로 돌아가 학장을 맡았다.

1963년 그는 한국 대표로 브라질 상파울루비엔날레에 참가했다. 돌아오는 길에 뉴욕에 들렀다. 한두 달 정도만 머물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대로 뉴욕에 정착했다. 이때 김환기 나이는 쉰 살이었다. 대학교 교수직을 버리고 새로운 무언가를 도전하기 쉬운 나이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김환기는 모험을 택했다.

당시 뉴욕은 파리를 제치고 현대미술 메카로 떠오르던 중이었다. 이 역전의 주역이 액션페인팅으로 유명한 잭슨 폴록이다. 김환기가 뉴욕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폴록이 사망한 지 몇 해 지난 후였다. 하지만 폴록이 일궈놓은 추상표현주의 미술이 절정을 이뤘다. 김환기도 이 장르에서 영향을 받았다. 뉴욕에 오고 난 후부터 김환기 그림 스타일은 확연히 변했다. 그동안 김환기는 백자와 꽃처럼 구체적인 대상을 소재 삼아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완전한 추상화로 나아갔다. 점, 선, 면, 색처럼 기본적인 조형 언어를 재료로 모험을 시작했다. 김환기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해체하고 또 해체했다. 그는 점점 '점'으로 향했다. 김환기는 거대한 캔버스 위에 점을 찍기 시작했다.

뉴욕 시절에 그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 <환기재단>
◆ 그리움이 사무친 그림

유독 눈동자에 그리움이라는 감정이 가득한 사람들이 있다. 김환기가 그랬다. 그는 해외여행도 자유롭지 않던 시절에 오직 예술을 위해 일본, 파리, 뉴욕에 갔다. 그곳에서 그는 이방인이었고, 자주 그리움 속에 파묻혔다. 1970년에 그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김환기 추상화 대표작이다. 지나간 시간에 관한 애틋함이 아득히 스며든 작품이다. 이 그림 제목은 '저녁에'라는 제목의 시 마지막 구절에서 따왔다. 이 시를 쓴 김광섭은 김환기와 오래 교류한 시인이었다. 뉴욕에 있는 동안 김환기는 김광섭과 편지를 자주 주고받았다. 김광섭은 자신의 시 '저녁에'를 써서 뉴욕에 붙였다. 시 전문은 이렇다.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 별 하나가 나를 나려다 본다 /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 밤이 깊을수록 /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 나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 이렇게 정다운 / 너 하나 나 하나는 / 어디서 무엇이 되어 / 다시 만나랴"

시를 읽은 화가 마음엔 슬픔의 파도가 일렁거렸다. 고향이었던 안좌도가 그리웠고,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추억했다. 선술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예술을 이야기하던 친구들을 떠올렸고, 그 친구 중 비참하게 세상을 떠난 이중섭을 추억했다. 이 모든 지나간 시간을 생각하며 그리움이라는 파도에 파묻혔다. 김환기는 붓을 들고 고향 바다의 푸른색 점을 찍었다. 점 하나를 찍을 때마다 이제 다시는 만나지 못할 다정한 얼굴과 추억을 떠올렸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서글픔, 그리움, 애틋함이 흐르는 작품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뉴욕에서 김환기 그림은 꽃을 피웠다. 하지만 김환기는 생전에 이 과실을 누리지 못했다. 그의 그림은 팔리지 않았다. 미국 생활 내내 부부는 생활고에 시달렸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고급 교육을 받고 명문대 교수까지 맡았던 김환기는 팔자에 없던 육체노동까지 했다. 미국 생활 초기 그는 넥타이공장에서 일할 정도로 형편이 좋지 않았다. 병원비를 아끼려 몸이 아파도 참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낮에는 햇빛이 아까워 붓을 안 들 수가 없고, 밤에는 전깃불이 아까워 그림을 안 그릴 수가 없다"고 말하며 그리움을 눌러 담아 점을 찍었다. 1974년 그는 뇌출혈로 쓰러졌다. 고향을 생각하던 그는 예순을 갓 넘긴 나이에 타국에서 여정을 마쳤다.

추상화 앞에서 관객이 주로 느끼는 감정은 혼란이다. 구체적인 피사체가 없는 추상화는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많은 관객은 김환기 추상화 앞에서만큼은 어떤 설명을 듣지 않고도 스르르 무장해제된다. 서글픈 푸른색 점들은 관객을 저마다의 추억열차에 태운다. 누군가는 이 푸른 점을 통해 지금 내 나이보다 어렸던 부모의 얼굴 보고,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버린 사람을 생각한다. 점을 찍었던 화가가 그랬던 것처럼.

김환기는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새벽부터 비가 왔나 보다. 죽을 날도 가까워 왔는데 무슨 생각을 해야 되나. 꿈은 무한하고 세월은 모자라고." 사람들은 자신만의 우주를 품고 산다. 세월은 흐르고, 인간이라는 우주에는 그리움이 별처럼 쌓여간다.

[조성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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