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화로 새겨진 흥남철수 70년

2021. 3. 6.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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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필국 앵커 ▶

1950년 한국전쟁 당시 10만 명의 주민들을 피난시켰던 흥남철수작전, 한번쯤 들어보셨죠?

벌써 70년 넘는 세월이 흘렀는데요.

◀ 차미연 앵커 ▶

네, 당시 피난민들이 도착했던 거제도에 특별한 벽화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이상현 기자가 다녀왔습니다.

◀ 리포트 ▶

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해지던 1950년 12월.

함경남도 흥남지역에 고립됐던 국군과 유엔군은 열흘간 대규모 해상 철수작전을 벌이게 됩니다.

서울 1.4 후퇴의 시작을 알리는 철수였습니다.

[굳세어라 금순아(1953, 현인)]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당시 체감온도 영하 30도의 흥남부두는 20만명에 달하는 피난 인파가 몰렸는데, 이 때문에 국제시장같은 영화나 드라마, '굳세어라 금순아'같은 대중가요 등에서 단골 소재로 등장하곤 했습니다.

그때 철수작전에 동원된 193척의 선박중 마지막 남았던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12월 23일, 군수품 대신 1만 4천명의 피난민들을 태우고 남으로 향하게 됩니다.

다음날 부산항을 거쳐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이들이 도착한 곳은 거제도의 장승포항.

사망자는 단 한명도 없었고, 사흘간 배 안에선 김치파이브라 이름붙여진 5명의 아이까지 태어나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불리워졌습니다.

인류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을 구조한 배로 기록됐던 이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당시 장승포항 수심이 낮아 바다에 떠 있어야 했는데, 섬 주민들이 수많은 어선을 동원해 배 위의 피난민들을 무사히 상륙시켰고, 먹을 것과 잠자리를 나누며 이들과의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게 됩니다.

그로부터 70년.

그때 그 이야기가 당시 피난민촌이었던 그 동네에 벽화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김동성/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거제시협의회장] "피난민들의 판자촌이 이렇게 도시로 바뀌었는데 여기에 어떤 상징적인 벽화를 그리자, 그럼 무엇이 있을까? 빅토리호가 장승포항의 기적이라고 하거든요. 그 기적을 여기에서 스토리텔링으로 한번 그려보자."

평화를 베푼 도시, 거제 주민들의 자긍심을 고취시키고자 기획된 이 벽화작업은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속에 흥남철수 70주년이었던 지난해 말에 완성됐고, 조금씩 지역의 명물이 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70년전 피난민들이 첫발을 내디뎠던 장승포항 일대도 새롭게 변하고 있습니다.

김해공항에서 차량으로 거가대교를 건너면 과거보다 손쉽게 만나게 되는 거제도와 장승포항.

우선 항구는, 가족나들이 장소로 애용되고 있는 수변공원으로 조성됐는데, 한복판엔 피난민들을 안아준 거제인들의 깊은 정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들어섰습니다.

[이상현 기자/ 통일전망대] "70년전 피난민들이 도착한 장승포항입니다. 이곳이 장승포항 여객터미널이 있던 건물인데요, 10년전 거가대교가 개통된 이후 이렇게 텅 비어있었는데 앞으론 흥남철수 기념공원으로 조성될 예정입니다."

150억원이 투입되는 흥남철수 기념공원은 올해말 착공에 들어갈 예정인데요.

4년쯤뒤엔 이곳에 흥남철수의 역사성과 피난민의 생활상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기념관과 해양경관을 조망하는 복합문화공간이 생긴다고 합니다.

[변광용/거제시장] "우리 후세대들이 그때 당시의 흥남철수 작전을 기억하고 평화의 소중함을 다시한번 느끼는 그런 공간으로 저희들이 조성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항구 뒤편으론 이른바 '기적의 길'이 조성됐습니다.

이곳에서도 좁은 골목길 따라 조그마한 건물 곳곳에 흥남철수의 기적을 이야기해주는 벽화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요.

특히 피난선에서 태어났던 김치파이브의 이야기 그림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수소문끝에 그 이야기의 주인공 중 한 명을 찾아가봤습니다.

장승포항 인근에서 40년 넘게 수의사로 가축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이젠 일흔한살 할아버지가 된 이경필씨.

1950년 12월 흥남철수의 상선, 그 메러디스 빅토리호에서 태어난 아기 5명중 막내입니다.

김치파이브중 첫째 아이와는 지금도 교류하고 있지만, 둘째와 셋째, 넷째 아이는 여전히 그 소식을 모른다는데요.

피난왔던 그때의 기억은 없지만 달랑 사진기 두대만 들고 왔다는 아버지를 통해 그때의 비극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껴왔다고 합니다.

[이경필/ 김치파이브 (수의사)] "잠시 피난가서 좀 있어라, 그래서 (아버지가) 할머님 놔두고 피난왔다고요, 그리 떨어질줄 알았으면 사진이라도 한장 갖고 왔으면 좋은데 사진 한장도 없이..또 (할머님이) 언제 돌아가셨는지 모른다 아닙니까"

훗날 고향에 유골을 뿌려달라는 유언과 함께 자신의 묘에 흥남 고향집 주소를 새겨놓고 가신 아버지는 평생, 평화라는 이름을 내건 사진관과 잡화상을 운영하셨습니다.

[이경필/ 김치파이브 (수의사)] "그래서 아버지에게 물었지 왜 이렇게 평화를 고집하십니까? 서로 사이좋게 전쟁없이 지내면 좋겠다, 왕래를 하면 좋겠다. 평화, 쉽게 말하면 전쟁하지 말자 그런 뜻이 있더라고요."

이렇게 흥남철수가 남긴 교훈은, 거제도 하면 떠오르는 장소, 포로수용소 유적지에도 오롯이 새겨져 있습니다.

한국전쟁중 최대 17만여명의 포로들이 수용됐던 이 장소에선 당시 수용소의 모습뿐 아니라 피난민들의 판자촌 풍경을 엿볼 수 있습니다.

또 1.4후퇴를 기념해 14미터 높이로 만든 흥남철수작전 기념탑과 필사적으로 배에 오르던 피난민들 모습을 담은 조형물, 그리고 작전을 성공시킨 영웅들의 얼굴들을 만날수 있습니다.

[이심선/ 거제시 문화관광해설사] "지금 여기 보시면 이 비를 건설하고 공원을 조성할 당시에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어요. 그런 도움을 주셨던 분들은 대부분 거제도로 피난을 왔던 피난민들, 여기서 정착하시거나 아니면 여기서 살다가 가셨던 그런 분들이 도움을 주셔서 이 공원을 조성하게 된거죠."

전쟁포로와 피난민들.

과거의 아픈 역사가 낳았던 이들을 껴안으며 때로는 고통을 감내하고, 때로는 희망을 품어냈던 한반도 제2의 섬 거제도.

70년 세월이 지난 이제, 평화를 상징하는 도시로 다시 태동하며 제2의 항해를 꿈꾸고 있습니다.

통일전망대 이상현입니다.

기사 원문 - https://imnews.imbc.com/replay/unity/6109917_2911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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