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 위해서라면 고춧가루 싸들고 미국도 가는 'K할머니' 통했다

남정미 기자 2021. 3. 6.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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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미나리'부터 '윈드'까지, 주목받는 '한국 할머니'
영화 '미나리' 속 할머니는 어린 손주를 돌보기 위해 고춧가루, 멸치를 싸들고 미국 아칸소로 날아온다. /판 시네마

영화 ‘미나리(Minari)’ 속 할머니 ‘순자(윤여정)’는 어린 손주를 돌보기 위해 한국에서 미국 아칸소주(州)로 날아온다. 한국에서는 미국 아칸소로 가는 직항기가 없다. 댈러스 등 근처 대도시에서 한 번 이상 경유해, 수십 시간을 와야 한다. 고된 여정에도 피곤한 기색 하나 없는 그는 가방에서 각종 봉지를 꺼낸다. 그 속에는 한국에서 가져 온 고춧가루와 마른 멸치, 한약재가 담겨 있다. 감격해 울먹이는 딸에게 그는 말한다. “야, 또 울어? 멸치 때문에 울어?”

지난 1일 제78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외국어영화상을 받은 미나리는 아메리칸 드림을 향해 미국으로 이주한 한인 가족의 정착기를 그린다. 이 과정에 빠질 수 없는 인물이 ‘할머니’, 순자다. 우리보다 먼저 미나리가 개봉된 미국에서는 ‘할머니가 영화 전체를 훔쳤다’(온라인 커뮤니티 레딧), ‘매우 매력적이고 독창적인 인물’(미국 잡지 필름메이커) 등 할머니 캐릭터에 대한 찬사가 이어졌다.

‘할머니의 사랑’은 그간 한국 대중문화에서 꾸준히 사랑받는 서사였다. 최근엔 이 사랑이 국경을 넘어서고 있다. 한국 할머니, 이른바 ‘K할머니’다. K할머니는 영어는 잘 못해도 가족들이 필요하다면 한국 음식 싸들고 바다를 건너고, 바쁜 부모를 대신해 손주를 돌보며, 학교에서는 배우지 못하는 삶의 지혜를 전한다.

◇'K할머니' 통했다

‘할머니(halmoni)는 모니카(딸)에게는 위로의 원천이 되고, 데이비드(손주)에게는 당혹스러움의 대상’이다. 캐나다 유력 일간지인 글로브앤드메일의 미나리 비평이다. 최근 영미권 매체들은 영화 ‘미나리’를 소개하면서 할머니를 아예 한국어 발음 그대로 ‘할머니(halmoni)’로 소개하고 있다. 할머니를 고유명사로 써도 알아들을 만큼 대중들에게 이 단어가 친숙하며, 기존의 영어 단어 할머니와는 구별되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지난 1월 25일 미국 최고 아동문학상인 ‘뉴베리상’을 받은 ‘호랑이를 잡을 때(When You Trap a Tiger)’에도 ‘halmoni’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 책의 작가는 한국인 할머니를 둔 테이 켈러다.

미 최고 아동문학상을 받은 테이 켈러는 "(할머니의) 김치와 흑미밥이 나를 키웠다"고 했다. /연합뉴스

이 책은 할머니가 들려준 옛날이야기 속 호랑이가 손녀 릴리의 눈에 실제로 보인다는 설정에서 시작된다. 릴리는 아픈 할머니의 건강을 되찾기 위해 호랑이와 거래를 한다. 뉴베리상 심사위원단 역시 ‘halmoni’란 표현을 그대로 살려 심사평을 남겼다. “그의 할머니(halmoni)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공유하고 미래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난 3일 유튜브에서 공개된 픽사의 단편 애니메이션 ‘윈드(wind)’도 한국 할머니의 희생과 사랑을 핵심 소재로 삼는다. 깊숙한 지하 동굴에 할머니와 손자가 갇혔다. 할머니는 손자를 1인용 로켓에 태워 먼저 보낸다. 자신은 나중에 꺼내달라고 한다. 지상으로 나간 손자가 할머니를 구조하기 위해 밧줄을 내려 보냈을 때, 다시 올라온 것은 할머니가 손자를 위해 만든 작은 감자 도시락이다. 윈드의 각본과 연출을 맡은 에드윈 장(한국명 장우영)은 한인 2세다.

픽사 애니메이션 ‘윈드’는 한국 할머니의 사랑과 희생을 핵심 소재로 한다. /연합뉴스

◇“할머니 지혜 창작 토대 돼”

K할머니는 단순히 서사 안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정이삭 감독과 장우영 감독, 테이 켈러는 실제 조부모의 손에서 자랐다. 이들은 ‘K할머니'에게서 받은 지혜와 사랑, 전통문화를 창작의 토대로 삼는다.

‘미나리’는 미국에서 자란 정이삭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다. 정 감독은 영국 BBC 인터뷰에서 “미나리는 새로운 환경에서 번성한다는 은유도 되지만, 할머니의 지혜에 대한 나의 사랑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했다. 그는 영화 마지막 엔딩 크레디트에 ‘To All Our Grandmas(모든 우리의 할머니들께)’라는 문구를 남겼다.

테이 켈러 역시 정 감독처럼 어릴 적 한국인 할머니와 함께 자랐다. 그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김치와 흑미밥, 이야기로 자랐다’고 자신을 소개한다. 테이(tae)도 할머니의 이름 태임에서 딴 것이다. 어릴 적 외할머니가 들려 준 전래동화 속 호랑이 이야기가 이번 작품을 쓰는 데 큰 자양분이 됐다.

윈드에 나온 ‘감자 도시락’은 평안북도에서 아들 넷을 데리고 피란 온 장 감독의 할머니가 자주 해주던 음식이다. 그는 “부모 자식의 관계는 우리 정체성의 본질이지만, 특히 아시아권에서는 조부모님이 가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했다.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김치호 교수는 “문화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책임감 때문에 엄격한 부모에 비해, 손주에 대한 조부모들의 조건 없는 사랑은 세계 어디서나 통하는 정서”라며 “특히 최근 코로나 등으로 ‘가족’에 대한 의미가 더욱 중요해진 것 같다. 결핍돼 있는 가족애(愛)와 같은 부분을 우리의 할머니 서사가 채워주는 게 아닌가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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