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현의 Pick] 묵직하고 고소한 상아색 지방.. 어른이 돼서야 알게된 이 맛

정동현 음식칼럼니스트 2021. 3. 6.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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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차돌박이
서울 송파구 삼전동 ‘부농정육식당’ 차돌박이./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밥상에 고기가 없으면 동생은 화를 냈다. 어머니는 동생에게 “고기 많이 먹으면 성격이 사자처럼 변한다”고 나무랐다. 그런 말을 들으면 동생은 더더욱 사자처럼 투정했다.

우리 형제에게 차돌박이는 놀라운 발견이었다. 삼겹살은 아무래도 굽는 데 시간이 걸렸다. 차돌박이는 불에 닿기만 해도 먹을 수 있었다. 두 형제를 둔 집에서 삼겹살로도 벅찬데 차돌박이는 안 될 말이었다. 이런 지경이라 집에서는 차돌박이 먹은 기억이 별로 없다.

어른이 되어 회식할 때 가끔 차돌박이를 시켜주는 상사가 있었다. 빨리 익은 차돌박이는 회식 자리의 마중물 같았다. 차돌처럼 지방이 단단히 박혀 있다 하여 차돌박이란 이름이 붙은 소의 뱃살 부위를 불판에 던져 놓았다. 낙지가 몸을 비틀듯 지방과 근섬유가 오그라들면서 핏기가 가셨다. 고기의 수분과 지방이 열을 받아 내뿜는 하얀 김, 고소한 냄새가 코에 닿을 때쯤 동료들과 눈을 마주치며 잔을 들었다. 삼겹살과 다른 농도 짙은 고소한 맛, 그리고 소고기 특유의 연한 핏내가 느껴졌다. 어른이 되어서야 제대로 알게 된 맛이다.

소고기를 취급하는 집이라면 대부분 차돌박이도 메뉴에 있다. 그럼에도 등심·안심 같은 고급 부위를 제치고 차돌박이라면 ‘그 집!’이라고 생각나는 곳이 몇 있다. 그중 하나가 서울 대치동 대치사거리 인근 ‘청자골’이다.

전남 강진 한우 암소를 쓰는 이 집은 반찬 가짓수가 많고 취급하는 메뉴도 다양한 이른바 ‘남도식 소고기집’이다. 한우 모음부터 돼지고기, 곱창전골, 김치찌개, 매생이탕 등 점심과 저녁, 소와 돼지를 아우르는 넓은 스펙트럼은 회사원 지갑이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는다. 볶은 묵은지, 파김치, 누석잠 장아찌, 메밀전병, 어리굴젓은 성의 없이 툭툭 던져 놓은 것들이 아니었다. 시간을 들였다는 티가 팍팍 났다.

고기를 보자면 안전하게 한우 모음도 좋지만 ‘키조개삼합’을 비켜 가서는 안 된다. 차돌박이와 키조개 관자, 표고버섯으로 구성된 이 메뉴는 식재료 조합이 오묘했다. 차돌박이를 먼저 올려 불판에 기름을 우려내고 그 위에 키조개 관자와 두툼한 표고버섯을 구웠다. 셋을 한꺼번에 입에 넣었다. 차돌박이의 무게감 있는 감칠맛이 처음 돌았다. 그 기름에 구운 키조개 관자는 잘 여문 단맛이 났다. 표고버섯은 소나무를 닮은 향내로 뒷맛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차돌박이를 먹는 또 다른 방법이었다.

강북으로 올라와 삼각지에 가면 ‘풍성집’이 있다. 삼각지에는 평양집, 봉산집처럼 차돌박이로 한가닥 하는 집들이 널려 있다. 그 중 풍성집은 다른 집처럼 정신 없이 바쁘고 번화하진 않다. 가정집처럼 푸근한 맛이 있다. 이 집 역시 전라도 무안과 신안에서 한우 암소를 잡아 올린다. 숙성시킨 한우 등심은 육질이 연했고 맛에 층에 쌓인 듯 입안에 여운이 판소리 자락처럼 오래 남았다.

이 집의 차돌박이는 다른 집보다 훨씬 두껍다. 기계가 없던 시절 칼로 쓱쓱 잘라 먹던 예스러운 멋이 났다. 차돌박이를 얇게 써는 이유는 지방이 단단하고 근막이 질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당히 숙성을 거친 차돌박이를 두껍게 썰어 먹으니 씹는 맛이 질기게 느껴지지 않았다. 여기에 고춧가루, 고추씨로 맛을 낸 간장을 찍으면 느끼한 맛이 줄어 몇 판이라도 차돌박이를 먹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냉이를 듬뿍 넣은 된장찌개로 마무리하니 ‘풍성집’이란 이름을 다시 보게 됐다.

잠실 삼전동에 가면 ‘부농정육식당’이 있다. 이름에 정육을 내건 본격적인 고깃집이다. 주차도 힘든 좁은 골목 밖으로 사람들이 튀어나올 것처럼 늘 북적이는 이 집은 소고기와 돼지고기 일체를 취급한다. 여느 집과 다르게 여주인이 큰 칼을 들고 고기를 썰었다. 그 폼이 영화 ‘쿵푸허슬’ 속 사자후를 내뿜는 무림 고수처럼 당당하고 거침없다.

이 집 역시 한우 암소만 골라 쓰는데 가격을 보면 “한우 맞아요?”라고 재차 확인하게 된다. 한우 특수 부위 모음 메뉴는 빨리 품절된다. 안창살, 치맛살 등 소 한 마리에서 얼마 나오지 않는 부위만 골라 먹는 재미가 있다.

차돌박이를 시키면 여주인이 고기를 냉장고에서 꺼내 그대로 육절기에 들이민다. 슥슥 잘려 나오는 차돌박이는 상아(象牙)색을 띤 지방이 박혀 있고 두께감도 상당하다. 잘 달군 불판 위에서 차돌박이가 익어갔다. 닭볏처럼 지방 부위가 살살 말릴 때쯤 한 번 뒤집고, 짙은 갈색이 될 때 젓가락질을 했다. 삼겹살과 다른 묵직한 맛이 흘러들었다. 어릴 때와 다르게 한 점 한 점 사람들과 함께 천천히 곁들였다. 뿌옇게 김이 났다. 그 사이로 웃는 동료들의 얼굴이 보였다. 어른이 되어야 알게 된 맛이었다.

#청자골: 한우구이 모음 9만원(400g), 키조개삼합 9만8000원. (02)935-0609

#풍성집: 숙성한우등심 3만2000원(200g), 차돌박이 2만6000원(200g). (02)795-2654

#부농정육식당: 한우특수부위 모음 9만5000원(450g), 차돌박이 4만9000원(400g). (02)413-3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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