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첫 봄비를 맞으며 마데이라를 마셨다

한은형 소설가 2021. 3. 6. 03:06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언론사에 의해 수정되어 본문과 댓글 내용이 다를 수 있습니다.

[한은형의 밤은 부드러워, 마셔]
[아무튼, 주말]

3월의 물이 내리는구나. 3월의 첫날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이렇게 생각했다. 비가 오면 세상은 왜 부드럽고 연해지는 걸까라고도. 이 부드러운 비를 맞으며 죽순의 싹이 돋아나오려고 발버둥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래, 봄이 오는 소리구나. 이건 봄비야. 예전 같으면 이렇게 생각하고 말았겠지만 이제는 ‘3월의 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와이퍼가 거세게 빗물을 쳐내는 걸 보면서 생각한다. 집에 돌아가 마데이라를 마셔야겠다고. 3월의 물을 뚫고 들어가 마데이라 한 잔을 따라 마실 생각을 하니 벌써 입에 침이 고인다. 처음 마데이라를 마셔 보고 깜짝 놀랐다. 세상에 이런 술이 있다니. 이렇게 향기롭고 시큼하면서도 달콤하고 쓰면서 투명한 술이. 포도로 만들었다는 이 술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과일의 즙을 뽑아 만든 술 같았다.

마데리아 와인. /와인폴리

‘3월의 물’이라는 노래 덕에 이 술을 알게 되었다. 앙토니우 카를루스 조빙의 ‘아구아스 지 마르쑤’. ‘에 빠우, 에 뻬드라, 에 우 삥 두 까밍유’ 이렇게 시작되는 야단스럽지 않게 경쾌한 노래다. 한국에서도 어느 정도 유명한 보사노바가 아닐까 싶으므로 첫 소절만 들어도 ‘아, 그 노래?’라고 할 곡이다. 나도 그랬었는데, 이제는 이 노래에 대한 자세가 좀 달라졌달까. ‘아구아스 지 마르쑤’가 ‘3월의 물’이라는 뜻임을 알게 되어서다. 또 마데이라를 만나게 해줘서.

‘아구아스’가 물이고, ‘마르쑤’가 3월이구나. 그래서 이렇게 청량한 것이었어. 라고 뒤늦게 감탄하면서 이 노래의 뜻도 궁금해 하던 내가 있었다. 나직하게 읊조리던 조빙의 목소리를 타고 어떤 이야기가 흘렀는지. 3월의 물이 무엇일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저도 그랬습니다. 좀 궁금해하다 말았다. 조빙은 브라질 사람이고, 이 노래는 포르투갈어로 되어 있어서, 우리 사이에는 장벽이 있었던 것이다.

그랬는데, ‘3월의 물’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을 받았다. 내 주변에는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다. 그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궁금증을 해결하며 사는 모습을 보며 저렇게 열정적으로 살 수도 있구나라며 감화되기도 하는데 이렇게 나한테까지 도움이 되기도 한다. 포르투갈어를 공부해가며 이 노래를 번역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내게 매우 유익하다. 직접 낚은 갈치회의 맛이 궁금했던 사람 덕에 팔딱거리는 갈치회를 맛보았던 것도 유익했지만 말이다.

‘에 빠우, 에 뻬드라, 에 우 핑 두 까밍유’의 뜻이 ‘그것은 나뭇가지, 그것은 돌멩이, 그것은 길의 끝.’이라는 뜻을 알고 머리가 얼얼해졌다. 나는 이토록 아름다운 발성과 가사로 이루어진 노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아름다움을 나누고 싶어 ‘3월의 물’의 번역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잠시 옮겨본다. ‘그것은 나뭇가지, 그것은 돌멩이, 그것의 길의 끝./그것은 남은 그루터기, 그것은 약간의 외로움./그것은 유리조각, 그것은 생명, 그것은 태양./그것은 밤, 그것은 죽음, 그것은 끈, 그것은 낚시 바늘./그것은 벌판의 뻬로바 나무, 그것은 나무의 옹이./까잉가 나무, 깡데이아 나무, 그것은 줄무늬 뻐꾸기 마치따 뻬레이라./그것은 바람에 잘 견디는 나무, 협곡의 폭포/그것은 심오한 신비, 그것은 원하거나 원치 않는 것.’

더 보다 보면 ‘3월의 물’이 드디어 나온다. 조빙은 이렇게 말하듯이 노래한다. 그것은 강기슭에서 내리는 비이며, 3월의 물의 나누는 대화이며, 고생의 끝이라고. 내가 3월의 첫날 내리는 봄비를 보며 기뻤던 것도 그래서였다. 겨울이 길었다. 길기도 했고, 춥기도 했고, 우울하기도 했고, 앓기도 했고, 그래서 쪼그라들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이 그랬듯 말이다. 3월의 첫날 이런 비가 길게도 내려주는 게 어떤 계시 같았다. 2월까지 다 보냈지만 제대로 한 해를 시작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의 등을 토닥여주는 손길 같기도 했고.

1972년의 안토니우 카를로스 조빙. /브라질 국립 문서 보관소

조빙의 나라에서도 3월에 내리는 비란 각별한 것이다. 브라질에서의 3월이란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시작되는 때다. 여기는 북반구, 거기는 남반구이므로 여기가 겨울일 때 거기는 여름이다. 그러니까 봄비가 아니라 장마. 길고 긴 비가 내리는 걸 보면서 여름이 끝나가는 걸 감각하는 노래인 셈이다. 알고 들으니 다르게 들린다. 이전에는 몰라서 신비했다면 이제는 알아서 신비하다. 뻬로바 나무나 마데이라 같은 단어들이 종이에서 일어나 입체로 바뀌기 때문이다. 마데이라 섬의 뻬로바 나무는 3월의 물이 내리는 날 어떻게 공중에 휘날리는지 말이다. 안 그래도 뻬로바 나무의 곡선에는 파도의 느낌이 묻어 있는데.

마데리아. ‘그것은 벌판의 뻬로바 나무, 그것은 나무의 옹이.’에서 ‘나무’가 마데이라(madeira)를 옮긴 것이다. 마데리아라는 단어가 묘해 사전에서 찾아보다가 마데이라에 다른 뜻이 더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는 마데이라 섬이며, 또 하나는 마데이라라는 술이다. 마데이라는 마데리아 섬에서 만들기도 하고, 다른 데서 만들기도 하는데, 좀 괜찮은 마데이라는 마데이라에서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럴 때의 나는 지체하지 않는 편이다. 마데이라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에 바로 일어섰다.

일단 색에 놀랐다. 위스키의 호박색과 피노누아의 맑은 선홍색을 섞은 듯하다. 영롱해. 그리고 코를 잔에 가져다대었는데… 이건? 이건 뭐라고 해야 할까? 봄의 냄새, 물의 냄새가 났다. 상냥하다, 상냥해. 이건 상냥한 맛이다라고 생각했다. 마데이라의 상냥함 덕분에 간만에 밤의 부드러움을 한껏 느낄 수 있었다. 술이 밤의 부드러움을 느끼게 해준다는 생각을 하게 된 이후 술을 각별하게 여기게 되었고, 이런 칼럼도 쓰고 있는데, 마데이라는 딱 그런 술이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 쓰고 있는 칼럼의 이름을 ‘밤은 부드러워, 마셔’로 짓게 된 것은 스콧 피츠제럴드 때문이다. 술을 꽤나 좋아하고 알코올 문제로 고생했던 그가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나오는 소설을 쓴 게 ‘밤은 부드러워’이다. 읽다 만 이 소설을 다시 읽게 된다면, 그건 그들이 어떤 술을 마시면서 밤을 부드럽게 보낼지 더 이상 궁금해하고 싶지 않을 때일 것이다.

마데이라를 마시면서 생각한다. 조빙은 ‘3월의 물’을 분명히 3월에 만들었을 거라고 말이다. 그것도 3월의 물이 내리는 날에 말이다. 하늘에서 물이 내리는 것을 보고 조빙은 기분이 이상해져 이 곡을 썼다고, 그리고 이런 가사를 적었다고 생각한다. 또 그의 손에는 마데이라가 들려 있었을 거라고. 마데이라가 곧 ‘3월의 물’이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는 말이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