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치! 코리아] 재개발 현장에 펄럭이는 태극기

김시덕 교수 2021. 3. 6.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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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식 강제 개발에 저항하면 '알박기' 비난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나라" 태극기 내걸고 항의 표현
재개발·철거 현장의 태극기. /김시덕 서울대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얼마 전 경기도 시흥시 북부를 답사했다. 도시 계획상 ‘대야1일반공업지역’이라 불리는 이 지역을 걷다가, 태극기가 한가득 붙어 있는 컨테이너를 보았다. 재개발·재건축 대상지에서 갈등이 폭발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이런 갈등에서 열세에 놓인 시민들은 태극기를 내걸어 자신들의 절박함을 드러내고는 한다.

재개발·철거 현장의 태극기. /김시덕 서울대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재개발을 둘러싸고 여전히 갈등이 진행 중인 서울 동작구의 옛 노량진 수산시장 건물엔 철거되기 전 2년 동안 태극기가 구석구석 그려져 있었다. 점점 비워지고 부서져 가는 옛 시장 건물의 그늘진 벽에 나란히 붙어 있는 철거 계고장과 태극기를 바라보며, 현대 한국의 갈등 도시에서 태극기가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지난해에는 서울 지하철 4호선 길음역 서북쪽의 개량 기와집촌이 철거되었다. 이 지역을 답사하던 중, 주민이 떠난 빈집의 창틀에 구겨진 채 남겨진 태극기를 보았다. 부유하지 않은 시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일수록 집의 문이나 창에 태극기가 펄럭이는 모습을 자주 본다. 그러나 태극기로 표출되는 이들 시민의 소박한 애국심은 대체로 재개발·재건축 사업으로부터 이들을 지켜주지 못한다.

재개발·철거 현장의 태극기. /김시덕 서울대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재건축·재개발에 반대하는 시민 개인이나 집단의 저항을 ‘알박기’라고 부르는 것을 흔히 듣는다. 물론 정말로 터무니없는 보상을 요구하는 알박기 행위도 존재한다. 하지만 정말로 그 땅을 빼앗기면 갈 곳이 없는 영세민도 존재한다. 2년 전 공공주택사업이 추진되고 있는 서울시 노원구와 구리시 갈매동 사이의 담터마을에서 주민 한 분이 극단적 선택을 하셨다. 이 분은 50여평의 땅을 소유하며 병든 부모를 돌보다가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이러한 선택을 했다고 한다. 재개발 사업에 대해 이분이 반대한 것을 감히 ‘알박기’라고 부를 사람은 없으리라 믿는다.

본질적으로 민주주의 국가이자 자본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자신의 재산을 지키거나 그 재산의 가치를 최대로 높이 평가받으려는 행위가 왜 ‘알박기’라는 용어로 비난받아야 하나? 현행 법률이 재개발·재건축 때 일정 퍼센트의 주민만 동의하면 비동의한 주민의 토지까지 수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개인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5공화국 초기인 1980년에 지정된 택지개발촉진법과 1983년부터 실시된 합동재개발에 따라 재개발과 재건축 현장은 공공의 이익이라는 명분을 위해 시민 개인의 재산권이 침해되고, 법치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사적(私的)으로 무장한 집단인 용역들이 활개 쳐도 공권력이 개입할 수 없는 무법 지대가 되었다. 6·25전쟁이 끝난 직후에는 주택 사정이 정말로 심각했기 때문에 강제적인 토지 수용이 어느 정도 용인되는 분위기가 사회적으로 존재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왜 이런 전시 상황이 지속되어야 하는가?

/김시덕 갈매역세권 마을에 내걸린 경고문.

국가는 구성체의 최말단에 있는 시민 개개인을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는가? 입으로는 한국이 자본주의 국가이고 사유재산은 신성하다고 하면서, 군사정권 시기 이래로 전쟁 치르듯이 자행해온 토지 몰수를 당연시하고, 시민 개인이 재산권을 주장하는 것을 ‘알박기’로 폄하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이들에게 맞서 태극기를 내건 시민들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민주공화국이자 자본주의 국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세금을 내야 한다는 시민의 의무를 강조하는 국가가 정작 시민의 재산권을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의무를 방기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대체로 국가는 이들 시민의 요청과 지적에 답하지 않는다. 결국 용역에 밀려나 주민들이 떠난 재건축·재개발 현장에는 태극기만 남겨져 펄럭인다.

재개발·철거 현장의 태극기. /김시덕 서울대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재개발·철거 현장의 태극기. /김시덕 서울대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재개발·철거 현장의 태극기. /김시덕 서울대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재개발·철거 현장의 태극기. /김시덕 서울대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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