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 인기 비결? 바보야, 실체는 ‘이야기’야”

박정훈 논설실장 2021. 3. 6. 03:04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언론사에 의해 수정되어 본문과 댓글 내용이 다를 수 있습니다.

노벨상 받은 쉴러 예일대 교수, 경제 이슈에 심리학 접목해 설명
“진실과 무관한 영웅담·소문들로 강화된 내러티브가 실물경제 영향”
/RHK 로버트 쉴러 교수의 '내러티브 경제학'

내러티브 경제학

로버트 쉴러 지음|박슬라 옮김|RHK|508쪽|2만2000원

정통 경제학자들에게 비트코인 열풍은 난해하기 짝이 없는 이슈다. 비트코인은 그 자체로는 아무 가치 없는 컴퓨터 알고리즘에 불과하다. 이자나 배당을 주지 않고, 금과 교환되지도 않으며, 중앙은행이 지급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비트코인 가격은 5000만원대로 치솟았고, 시가총액(9610억달러·3일 기준)은 페이스북·삼성전자를 추월해 세계 5위에 랭크돼있다. 이 불가사의한 현상에 어안이 벙벙한 각국의 통화 당국자들은 “투기성 거품”이라고 무시하는 태도로 당혹감을 감추려 한다. 17세기 ‘튤립 버블’처럼, 어느 순간 깨어나면 허망하게 스러질 집단 환상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베스트셀러 ‘비이성적 과열’의 저자로 유명한 로버트 쉴러 예일대 교수가 신작 ‘내러티브 경제학’에서 제시하는 설명법은 색다르다. 그는 내러티브(narrative), 즉 이야기라는 패러다임으로 비트코인 광풍을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 비트코인은 금융 아나키즘의 내러티브다. 창시자 사카시 나카모토 등은 비트코인을 부패한 정부와 탐욕스러운 금융업자에 대항하는 탈중앙의 무정부주의 운동으로 규정했다. 위인들의 초상이 새겨진 정부 발행 화폐는 국가주의의 표상이다. 반면 비트코인 지갑을 소유한다는 것은 세계 시민이 되는 것이다. 쉴러 교수에 따르면 비트코인은 ‘미래 참여’라는 내러티브를 제공한다. 불평등과 금융 착취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기득권 세력을 물리치고 미래의 경제패권을 장악할 첨단기술의 승리자들과 연결되기 위해 비트코인을 구입한다. 전설과도 같은 신기술 리더들의 영웅담, 일약 부를 거머쥔 비트코인 갑부들의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증폭되면서 비트코인의 가치를 확대 재생산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비트코인 열풍이 감염병 유행 곡선과 비슷한 궤적을 그릴 것이라고 본다. 금융 무정부주의라는 비트코인 ‘신화’는 전염성을 가지고 있다. 이 신화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이 계속해서 늘어나면 열풍은 계속될 것이고, 흥미를 잃으면 거품이 꺼질 것이라는 주장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이야기는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다. 저자는 인류를 ‘호모 내레이터’, 즉 ‘이야기하는 인간’으로 정의 내린다. 대중의 입에 오르내리는 내러티브의 전염이 경제적으로 의미 있는 현상을 형성한다. 중대한 경제 변동의 배후엔 그 시대 대중의 입맛을 사로잡은 내러티브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주가를 80% 폭락시킨 1929년 미국 대공황엔 ‘자동화 내러티브’가 있었다. 로봇 자동화 기술이 노동자를 대체해 실업을 늘릴 것이란 대중의 믿음이 대공황이라는 자기 실현적 결과를 만들었다. 1990년대 인터넷의 보급은 컴퓨터의 놀라운 힘에 관한 신앙 같은 내러티브를 탄생시켰다. 인터넷 시대라는 휘황찬란한 미래 내러티브는 첨단 기술 기업 주식에 투자해 그 일부가 되고 싶다는 대중의 동기를 자극했고, 이것이 ‘닷컴 버블’로 이어졌다.

내러티브는 사실뿐 아니라 감정, 흥미, 인상 등이 뒤범벅된 인공 구조물이다. 그것은 흥미진진한 에피소드와 결합될 때 더욱 강렬해진다. 감세론자들의 이론적 무기인 ‘래퍼 곡선’은 1974년 아트 래퍼라는 학자가 고안해냈을 당시엔 주목받지 못했다. 몇 년 뒤 래퍼가 공화당의 실력자 딕 체니 등과 식사하던 중 종이 냅킨에 이 그래프를 그려 설명했다는 ‘냅킨 내러티브’가 추가되면서 일약 유명해졌고 레이건 정권 감세 드라이브의 지침서가 됐다. 바퀴 달린 여행 가방은 1972년에 발명됐지만 소비자 호응을 받지 못했다. 이것이 여행자 필수품이 된 것은 그로부터 20년 뒤 항공사 승무원들이 사용하는 가방이라는 ‘승무원 마케팅’을 벌인 뒤였다. 냅킨에 휘갈려 쓴 공식이라는 시각 효과, 멋진 승무원들이 들고 다닌다는 쿨한 이미지가 대중적 전염을 폭발시킨 것이다.

2013년 노벨상 수상자인 쉴러 교수는 경제학에 인간 심리학을 접목시킨 행동 경제학의 대가다. 고전 경제학과 달리 그는 인간이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인 존재라고 본다. 진실과 무관하게 대중의 입소문을 통해 강화된 내러티브들이 자산 시장을 왜곡시키고 경제를 변형시키곤 한다는 것이다. 그 인과관계를 추적한다면 경제 변동의 미래 예측 또한 불가능하지 않다고 그는 주장한다,

비트코인의 미래는 어떨까. 저자는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다만 내러티브가 전염병과 똑같은 유행 곡선을 겪는다는 원리를 제시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한다. 바이러스는 전염률이 회복률을 웃돌 때 확산되고, 내려갈 때 감퇴한다. 비트코인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내러티브가 생명력을 유지하는 한 비트코인 열풍은 계속될 것이다. 반대로 대중이 비트코인 내러티브에 흥미를 잃는 순간 쉴러 교수가 일찍이 ‘비이성적 과열’로 명명했던 주택 버블 붕괴와 같은 운명을 맞을 수도 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