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머니-정략결혼으로 사회불만 잠재우는 절대권력[글로벌 포커스]
오래전 입헌군주제를 택한 서구 왕실은 달라진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생전 양위(讓位·왕의 자리를 물려줌), 여성 승계, 방계 왕족 정리 등에 나섰다. 그런데도 왕실 폐지 여론에 고심하고 있다. 중동에는 왜 이런 움직임이 없을까.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국경선조차 없이 부족 체제로 지내면서 국민들이 권력자의 권위주의 통치에 익숙해진 데다 주요국 왕실이 오일머니로 막대한 돈을 뿌려 국민 불만을 잠재운 것이 원인으로 꼽힌다. 석유에 의존하는 산업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이런 문화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란 분석이 제기된다.
○ 절대권력의 아랍 8개국 군주
전 세계에는 영국, 일본, 태국, 스페인 등 45개 군주국이 있다. 대부분 입헌군주제를 택했지만 사우디, 아랍에미리트, 오만, 바레인, 카타르, 쿠웨이트, 요르단, 모로코 등 아랍권 8개국만 군주를 견제할 의회 세력 등이 아예 없거나 있어도 유명무실하다. 겉으로는 입헌군주제를 표방한 나라조차 실상은 전제군주제란 뜻이다.
사우디에는 아예 의회가 없다. 오만은 의회가 있지만 국왕이 총리를 겸한다. 요르단은 국왕이 총리를 임명한다. 바레인은 법안 거부권이 있는 상원 40명 전부를 국왕이 임명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법을 뒤집을 수 있다. 바레인과 모로코 왕실은 2011년 이른바 ‘아랍의 봄’으로 불린 민주화 시위 당시 왕실 권력 축소를 주장한 시위대를 탄압했다.
아부다비, 두바이 등 7개 토후국 연합인 아랍에미리트에는 의회 역할을 하는 연방평의회가 있지만 내각이 제출한 법안을 심의할 뿐 왕실 인사가 대부분인 행정부를 견제하지는 않는다. 대신 7개 토후국이 서로 견제하면서 특정 토후국의 전횡과 독단을 막고 있다.
카타르는 아랍권 최초로 생전 양위제를 도입했다. 타밈 빈 하마드 알 사니 현 국왕(41)의 부친 하마드 전 국왕(69)은 2013년 아들에게 왕권을 물려줬다. 하마드 전 국왕은 천연가스와 석유에 의존하는 카타르의 산업 다각화를 주도했고 여성 참정권 부여, 알자지라 방송 설립, 2022년 월드컵 유치 등 다방면의 성과를 낸 일종의 계몽군주로 꼽힌다.
○ 권력자에게 복종하되 부는 분배
아랍 왕실이 절대왕정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로 권력과 재산을 일정하게 나눠주되 부족 내부의 이견을 용납하지 않는 유목문화의 전통이 거론된다. 오아시스를 찾아 떠돌며 생사고락을 같이하다 보니 남성 중심의 권위주의 체제가 정착됐고 부족 구성원들 또한 전투력을 앞세운 유력 가문에 복종하는 것을 당연시한다는 것이다. 유력 가문 역시 부와 권력을 적절하게 배분하고 정략결혼 등을 통해 불만을 차단했다.
사우디를 통치하는 사우드 가문이 이 방식으로 집권했다. 초대 이븐사우드 국왕(1875∼1953)은 아라비아반도 군소 부족을 통합해 1932년 건국했다. 최고 의사결정기구 ‘슈라’에서 주요 부족과 왕족의 전원합의제를 지향해 이견을 잠재우고 왕실 권위를 높였다. 또 정략결혼을 거듭해 알려진 것만 부인이 22명, 아들이 45명이다. 무함마드 왕세자 같은 손자대에는 왕자를 자처하는 사람만 1000명이 넘는다. 이븐사우드 국왕이 1953년 숨지기 전 유언으로 남긴 ‘형제 세습’ 역시 권력 분배 목적으로 이뤄졌다.
7대 국왕이자 이븐사우드 국왕의 25번째 아들인 살만 빈 압둘아지즈 현 국왕(86)에 이르기까지는 형제 세습을 통한 권력 분배가 이뤄졌다. 하지만 2017년 국왕의 아들 무함마드 왕세자가 원래 왕위 계승자였던 사촌형 무함마드 빈 나이프 왕자(62)를 몰아내고 부자(父子) 세습을 본격화하면서 내부 갈등이 커졌다. 실권을 잡은 무함마드 왕세자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원리주의 성향의 와하비즘 율법학자들의 반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성 운전 허용 등 개혁 정책을 단행하며 계몽군주를 자처하려 했다. 이로 인한 이슬람 보수세력의 불만이 커진 가운데, 거듭된 숙청에도 왕위 경쟁자인 삼촌, 사촌, 이복형제 등이 넘쳐나고 저유가 등으로 국민 불만이 높아지자 카슈끄지 살해 승인 같은 무리수를 뒀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쿠웨이트 역시 초대 무바라크 국왕(1837∼1915)의 두 아들인 자비르, 살림 가문이 교대로 세습하는 체제를 택했다. 오만은 1970년 건국 후 지난해 1월까지 카보스 빈 사이드 알 사이드 국왕(1940∼2020)이 줄곧 통치했다. 평생 독신으로 지낸 카보스 국왕이 사망하자 왕족 회의에서 사촌 하이삼 빈 타리끄 알 사이드 왕자(67)를 새 국왕으로 추대했다.
오일머니도 빼놓을 수 없다. 미국의 중동 전문가 마이클 로스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교수는 외교 전문지 포린어페어스 기고문에서 1980년부터 2013년까지 산유국이 권위주의 체제에서 민주주의로 전환한 비율이 비산유국의 4분의 1에 불과했다며 이를 ‘원유의 저주(oil curse)’로 진단했다. 넘쳐나는 오일머니로 각계각층의 불만을 잠재우고 사회 전체가 이에 길들여졌다는 의미다.
미 에너지정보국(EIA)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세계 일일 원유 생산량 8234만 배럴 중 약 23%(1919만 배럴)를 이 8개국이 담당한다. 이를 바탕으로 주요국 왕실은 왕위 계승 가능성이 없는 왕족에게도 월급 형태의 배당금을 지급하고, 국민들에게는 각종 보조금을 뿌려 내부 반발을 잠재우고 있다.
폭로 전문 웹사이트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1990년대 사우디 왕실 재무 문서를 보면 당시에도 초대 국왕 이븐사우드의 아들은 월 최대 27만 달러, 손자와 증손자들은 최대 월 8000달러를 받았다. 당시 사우디 공공지출의 약 5%가 왕실 배당금으로 쓰였다.
박현도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연구교수는 “정치 체제가 확 바뀌려면 ‘아래로부터의 변화’가 필요한데 왕실이 오일머니로 민심을 샀고 자유로운 비판을 막고 있기에 큰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분석했다. 이희수 성공회대 이슬람문화연구소장(석좌교수) 역시 “서구 관점에서는 현대 민주주의 체제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평가할 수 있지만 이권 배분을 통해 나름의 합리적인 권력 분점이 이뤄지고 있다고 볼 여지가 있다”고 했다.
○ 억압받는 여성 왕족
라티파 공주의 알제리 출신 어머니도 막툼으로부터 도망쳤다는 설이 있다. 공주의 언니 샴사 공주(40) 역시 2000년 “여자는 대학에 진학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영국으로 달아났지만 특수부대원에게 붙잡혀 두바이로 끌려온 뒤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샴사 공주가 8년 이상 감금됐다는 설도 나돈다. 라티파 공주는 언니가 학대받는 모습을 보고 탈출을 준비했으며 2002년 처음 탈출을 시도했다. 당시 오만 국경에서 붙잡힌 그는 두바이로 돌아온 후 3년 6개월간 감금됐고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막툼의 6번째 아내로 압둘라 2세 요르단 국왕(59)의 여동생인 하야 빈트 후사인 왕비(47) 역시 두 자녀를 데리고 2019년 영국으로 탈출했다. 그는 영국 법원에 이혼 소송을 제기하며 “남편으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요르단 국가대표 승마 선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등을 지낸 그는 억압적인 왕실 분위기를 견디지 못했다. 막툼의 첫 번째 아내로 1970년대 말 이혼한 레바논 출신의 란다 빈트 무함마드 알 반나(65) 역시 최근 “막툼이 내가 낳은 딸을 40년 넘게 만나지 못하게 했다”고 폭로했다.
지난해 4월 사우디 2대 국왕 사우드 빈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1902∼1969)의 딸 바스마 빈트 공주(57)도 “당국으로부터 이유 없이 구금됐다”고 주장했다. 역시 영국 유학파로 전용기까지 보유한 특권층이지만 여성 인권 보호 등을 주장했다가 왕실 눈 밖에 난 것으로 알려졌다.
○ 저유가로 원치 않는 변화 맞을 수도
저유가로 아랍 왕실이 예상보다 빠른 변화를 맞을 수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2011년 배럴당 100달러에 육박했던 국제 유가가 현재 50, 60달러대로 떨어진 것은 산유국 왕실에 상당한 압박으로 작용하고 있다.
8개국 중 지난해 기준 1인당 국내총생산이 높은 카타르(5만1885달러), 아랍에미리트(3만1948달러) 등은 나머지 6개국보다 산업 다각화에서도 앞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반면 사우디(1만9587달러), 오만(1만4423달러), 모로코(3120달러) 등은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특히 석유조차 없는 요르단에서는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언제든 국민 불만이 폭발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워싱턴포스트(WP)는 올해 1월 ‘아랍의 봄’ 10주년을 조명하는 기사에서 “아랍의 봄이 흐지부지된 것은 당시 고유가를 바탕으로 산유국 정부가 각종 지원 정책을 내세워 불만을 누그러뜨렸기 때문이지만 지금은 다르다”며 중동이 진짜 세계의 화약고가 됐다고 진단했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는 “아랍 왕실 역시 탈석유, 여성 인권 등 경제 사회적 변화를 추구해야 하는 것을 알지만 ‘부족장 문화 DNA’가 워낙 강하다 보니 주저하고 있다. 수백 년간 시민에게 권리를 나눠준 경험이 없기 때문에 권력 분배를 일종의 ‘생살을 뜯어내는 아픔’으로 인식한다”고 진단했다. 그는 “혜안을 가진 계몽군주라면 영국의 명예혁명처럼 개혁을 강화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국민 불만이 폭발해 피바람이 불 수 있다”고 덧붙였다.
카이로=임현석 특파원 lhs@donga.com / 김예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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