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은행 '돈풀기'에도 지켜야 할 한계 있다[동아광장/박상준]
이미 위험 수준 오른 정부 부채비율
가계저축 중앙은행 발권력으로 지탱
외부충격에 약한 원화는 위기에 취약
재정 지출하되 시장 신뢰 잃지 않아야
기업이나 개인이 이런 처지에 있다면 금융권에서 자금을 조달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정부라고 예외는 아니다. 조세수입에 비해 과도한 부채를 짊어진 정부가 발행하는 국채는 시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2010년대 초, 그리스와 이탈리아의 국채 가격이 급락한 것은 그런 연유에서였다.
일본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부채 비율이 100%를 넘긴 것은 이미 20년 전의 일이다. 국채 잔액이 위험 수준에 이르고 있다고 판단한 외국인투자가들은 선물시장에서 국채 가격의 하락에 베팅했지만, 기대와 달리 큰 손실을 입었다. 일본 국채의 가격이 오히려 상승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정부부채 비율은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 높은데 시장은 왜 여전히 일본 국채를 사는 것일까?
정부가 파산 위기를 맞았던 여타 나라와 달리 당시 일본 국채 대부분은 국내 금융기관이 보유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점점 더 많은 국채를 발행했지만 대부분 민간 금융기관의 수요에 의해 소화되었다. 금융기관이 계속해서 국채를 살 수 있었던 배경에는 평범한 일본인들의 예금에서 나오는 막대한 양의 자금이 있었다.
2010년대 들어 금융기관의 자금 여력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는 보고서가 나오기 시작했다. 국채의 규모가 가계 순금융자산 규모에 근접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일본은행이 양적완화를 내세우며 시중은행으로부터 대량으로 국채를 매입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시중은행에 계좌를 가지고 있듯이 시중은행은 중앙은행에 계좌를 가지고 있다. 중앙은행은 시중은행으로부터 국채를 매입하고 매입 금액만큼 시중은행의 계좌 잔액을 높여준다. 내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누군가의 계좌 잔액을 늘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중앙은행이 유일하다. 재무성은 신규 국채를 금융기관에 팔고, 일본은행은 최초 가격보다 약간 높은 가격에 금융기관으로부터 그 국채를 산다. 이제 일본 국채의 거의 절반은 중앙은행의 소유다. 일본 국채 가격이 금융기관이 유치한 가계의 저축에 의해 그리고 중앙은행의 발권력에 의해 지탱된다는 것을 아는 외국인투자가들은 더 이상 일본 국채 가격의 하락에 베팅하지 않는다. 일본 국채의 외국인 보유 비율은 2010년 5.6%에서 2020년 12.9%까지 상승했다.
그러나 이대로 괜찮은 것일까? 우리가 쓰는 화폐는 그 자체로 아무 가치가 없다. 시장이 화폐를, 보다 근본적으로는 화폐의 관리자인 중앙은행을 신뢰할 때만 가치를 인정받는다. 신뢰를 상실한 통화는 외환시장에서 그 가치가 급격히 절하된다. 통화 가치가 절하되는 나라의 국채를 사는 바보는 없다. 그런 일이 발생하면 국채의 시장가격이 급락하고, 국채로 자금을 조달할 수 없게 된 정부는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다. 이런 일이 일본에서 일어날 확률은 북한이 핵미사일을 발사할 확률만큼이나 낮겠지만, 그러나 만일 발생하면 그 피해는 상상 이상일 것이다. 국채에 대한 수요가 아직은 견조함에도 불구하고 일본 재무성이 노심초사하는 이유이다.
한국은 자국 통화에 대한 신뢰가 생각보다 크지 않은 나라이다. 충격이 올 때마다 원화가 절하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브렉시트 등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할 때마다 원화가 절하되었다. 최근 경제 상황이 어렵다 보니 재정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재정지출을 쉽게 하기 위해 국채를 한국은행이 더 적극적으로 매입하는 방안이 일각에서 제기되기도 한다. 경기침체기에 재정건전성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원화가 충격에 약한 통화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시장의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지켜야 할 한계가 있다.
박상준 객원논설위원·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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