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이 믿는 이야기가 경제 현실이 된다
경제 내러티브 확산 사례 분석
비트코인 현상도 내러티브
'모형화' 통해 사전 대비 주문
로버트 쉴러 지음
박슬라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요즘 들어 암호화폐 비트코인만큼 인구에 많이 회자하는 말은 드물 것이다. 폭등과 폭락을 거듭하며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비트코인은 창시자 사토시 나카모토 스토리와 블록체인 기술, 미래의 운명 등 여러 ‘내러티브(narrative)’를 양산하며 21세기 경제의 새 신화를 써 내려 가고 있다. 투자자들이 떠들어 댄 입소문에서 비롯된 비트코인 내러티브는 ‘이제 컴퓨터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으며 지역정부의 부패와 무능이라는 끝없는 문제에서 해방될 새로운 코스모폴리탄 시대로 들어서고 있다’는 생각을 암시한다.
내러티브는 특정한 관점이나 가치관을 반영하고 고취하는 방식의 이야기다. 내러티브 경제학은 데이터를 중시하는 전통의 경제학과는 달리 대중 내러티브의 ‘전염적 확산’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고 해법을 마련하기 위해 등장했다.
신간 『내러티브 경제학』은 닷컴 버블의 종말을 예측하기도 한 행동경제학의 대가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쉴러 예일대 교수가 썼다. 쉴러는 “대중 내러티브가 바이럴(viral)되어 경제적 결과를 낳으면 경제 내러티브가 된다”며 “이러한 관련성을 모형화해 경제 사건을 예측하고 대비하는 능력을 키워야 할 것”이라고 집필 목적을 밝혔다.
이 책은 비트코인 내러티브를 비롯해 많은 사례를 들면서 이들 경제 내러티브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면밀하게 들여다봤다.
감세를 공약한 마거릿 대처와 로널드 레이건은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각각 79년 영국 총리와 80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돼 세계 경제의 흐름을 단숨에 바꿔 놓았다. 내러티브가 사고를 조직화하는 데 큰 위력을 발휘한 사례다.
경제 분야에선 ‘영속적’ 내러티브들이 많다. 공황과 신뢰 내러티브가 대표적이다. 1907년 미국 공황 당시 개인 재산을 이용하면서까지 다른 은행가들을 설득해 은행들을 구제하고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 창설에 크게 기여해 경제 신뢰를 회복한 일등공신인 JP 모건 내러티브는 유명하다. 대공황이 최악에 달한 1933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것은 두려움 그 자체”라는 명언을 남겼다. 이보다 3년 전 예일대 어빙 피셔 교수가 먼저 쓴 말이지만 루스벨트 연설 이후 급속히 확산돼 시장의 패닉을 진정시키고 대공황을 극복하는 데 큰 힘을 보탰다.
‘아메리칸 드림’ 내러티브의 저작권은 제임스 트러슬로 애덤스에게 있다. 1931년 처음 선보인 이 말은 애덤스 생전엔 거의 바이럴이 되지 않았지만 인권운동가인 마틴 루서 킹 주니어가 1963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에서 사용하면서 대중화했다. 이 말은 그러나 진화해서 ‘내 집 마련 꿈’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변이돼 정부가 주택 거품을 지원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기도 했다.
부동산과 주식 시장 거품 내러티브도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최근엔 인공지능(AI) 내러티브가 유행하고 있다. 기술적 실업 내러티브의 대표적인 사례인 이 말은 자동화에 대한 두려움은 대개 불황이 임박했다는 공포와 연관되어 있다. 기계는 이젠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지만 소득불평등이나 실업에 관한 뉴스가 등장할 때면 이 내러티브의 공포 버전이 다시 유행할 수 있다.
소셜미디어로 대표되는 정보기술의 발전은 내러티브가 전염되는 방식을 완전히 뒤바꿀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내러티브가 경제현상을 분석하는 데 더 폭발적인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다이나믹한 한국에서도 내러티브 경제학이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한경환 기자 han.kyunghw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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