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자체가 범죄인데 항명을 왜 따지나
전쟁은 내가 죽느냐 적을 죽이느냐 서슬 푸른 선택의 연속이다. 내가 죽지 않기 위해, 내 가족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못할 일이 무엇이겠니. 아무리 온순한 사람이라도 곁에 있던 친구가 총을 맞고 죽어간다면 상대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게 마련이야. 또 전쟁은 인간 내면에 그을음처럼 붙어 있는 광기를 긁어 올려 평소의 상식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인간의 악마성을 적나라하게 토해내는 장이기도 하지. 무슨 수를 써서든 피해야 하지만, 일단 터지면 무슨 수를 쓰든 이겨야 하는 게 전쟁이니까. 하지만 전쟁에도 지켜야 할 규칙은 있다. 포로를 학대하거나 죽이는 일, 전투원이 아닌 비무장 민간인을 살해하는 것은 중대한 범죄야.
1964년 북베트남군이 미국 함정을 공격한(또는 그렇다고 주장되는) 통킹만 사건 이후 본격적으로 베트남전쟁(월남전)에 뛰어든 미국은 막대한 인력과 화력을 퍼부어 승기를 잡아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1968년 1월 베트콩(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구정 대공세 때 미국 대사관이 습격당하는 모습이 만천하에 공개되면서 체면을 구기고 말았지.
1968년 봄, 신경이 곤두선 미군은 치열한 전투를 치르며 베트콩을 섬멸했지만 희생자도 많이 냈다. 남베트남 꽝응아이주 일대에서 작전 중이던 미군 제23사단 11여단 20연대 1대대 C중대 역시 베트콩의 공격으로 적잖은 동료를 잃었고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지. 베트콩 준동 마을로 꼽힌 성미 마을을 두고 연대장은 “쓸어버려”라는 명령을 내렸고 대대장은 “가옥을 불사르고 우물을 폐쇄하고 가축을 죽이라”라는, 즉 게릴라 근거지로서의 기능을 박멸시키는 작전을 명령한다. 이후 중대장은 “베트콩으로 의심되는 모든 민간 저항군”을 다 쓸어버리라고 휘하 소대에 지시했다. 입대한 지 넉 달밖에 되지 않았고 그나마 장교 자질이 부족하다는 평을 들었던 윌리엄 캘리 소위는 이를 “민간인 포함해서 다 쓸어버리라”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캘리 소위 이하 소대원들은 미라이 마을(실제는 이름은 성미 마을인데 미군 지도에 미라이 마을이라고 표기돼 있었지)로 투입됐다. 미군들은 미라이 마을 사람들을 마을 중앙으로 모이게 했어. 미라이 마을 사람들은 긴장했지만 공포에 질리지는 않았지. 우리로 치면 주민등록증을 가진 엄연한 남베트남 양민들이었으니까. 미군들이 거칠게 마을 가운데로 몰아갈 때에도 그들은 계속 주민등록증을 내밀며 자신들이 무고한 베트남 시민임을 표하려 했어. 이미 살인 허가를 취득한 군인들에게 밑씻개로도 못 쓸 종잇조각일 뿐이었지만. 최근 넷플릭스에서 본 드라마 〈스위트홈〉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할아버지가 한 말 기억나니? “난리 통에 군인들 믿는 거 아니야.”
학살이 시작됐다. 찰리 소대에 이어 투입된 다른 대대원까지 합세해 미군은 온 마을 사람을 몰살시켰지. 남녀를 가리지 않았고 노소의 구분도 없었어. 학살 직전 공포로 울부짖는 마을 사람들을 찍은 사진에는 할머니와 물정 모르는 네댓 살 아이들까지 담겨 있다. 마을 사람들은 피를 토하며 쓰러져갔어. 어떤 이는 사지가 토막 나기도 했고, 젊은 여자의 경우 성폭행 후 살해되었지. 이런 식으로 500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죽어갔다. 자유의 십자군을 자처하던 미군들이 글자 그대로 인간성을 잃은 ‘좀비’로 변해 베트남 사람들을 물어뜯었던 거야.
좀비들 사이에서 터져 나왔던 인간다운 저항
당시 눈앞에서 벌어지는 대학살을 막아설 수는 없었지만 이를 세상에 폭로할 것이라 다짐한 사람들도 있었어. 종군기자 로널드 해벌은 미라이 학살을 담은 필름을 미군 당국에 제출하는 한편, 개인 카메라에도 그 끔찍한 기록을 낱낱이 담아 빼돌렸다. 동료의 증언으로 학살의 참상을 파악하게 된 미군 병사 론 라이덴하워는 닉슨 대통령부터 언론에 이르기까지 수십 군데에 미군 부대원들이 저지른 죄악상을 고발하는 편지를 보냈어. 이를 발판으로 1969년 미라이 학살에 대한 심층 보도가 나오게 되고, 미라이 학살은 세상에 알려졌단다. “정부에 속고 사는 미 국민들을 위해, 미국의 타락한 인간성과 도덕을 살리기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라는 것이 미라이 학살을 세상에 알린 한 종군기자의 코멘트였지.
미라이 마을에서 미군들은 ‘좀비’처럼 M16 소총을 휘둘렀지만 ‘인간’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란다. 그중 한 명은 작전을 지원 나온 헬기 조종사 휴 톰슨 준위. 그는 헬기를 조종하다가 좀비들의 광란을 목격한다. 헬기를 착륙시키고 캘리 소위에게 달려가 학살을 중단하라고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어. 빈손으로 물러났지만 현장을 떠날 수는 없었지. 마을을 주시하며 비행하던 중 가까스로 살아남은 양민들마저 살해될 위기에 처하자 톰슨은 자기 휘하의 기관총 사수들에게 절규했다.
“착륙한다. 내 명령에 불복하는 놈들은 쏴버려. 반복한다. 불복하면 쏴버려.” 기관총 사수들이 ‘좀비’들을 겨누는 가운데 톰슨은 민간인 10여 명을 구할 수 있었어. 그러나 ‘좀비 사회’에서 인간은 왕따가 되고 말았지. 미라이 학살 사건이 알려지고 캘리를 비롯한 혐의자들이 법정에 섰을 때 증인으로 나섰던 톰슨은 엄청난 핍박을 감수해야 했어. 그가 장교 클럽에 들어서면 장교들은 눈짓을 하며 썰물처럼 빠져나갔다고 해. 무슨 마피아 영화에서 보듯 집 현관에 동물의 사체가 던져지기도 했다니 알 만하지. 심지어 미국 하원의 몇몇 의원은 “군법회의에 회부돼야 할 사람은 바로 당신”이라며 톰슨을 겁박했다. 그래도 톰슨은 버텼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분노하던 그 마음이었겠지. 먼 훗날 그가 베트남을 방문해 자신이 살린 소녀를 만났을 때 아마도 그는 일생에서 가장 잘한 일로 기관총 사수들에게 명령하던 순간을 떠올렸을 거야. “내 명령에 불복하는 놈들은 쏴버려. 반복한다. 불복하면 쏴버려.” 좀비들 사이에서 터져 나왔던 인간다운 저항. 인간다운 외침.
이 가공할 전쟁범죄로 기소된 캘리 소위는 중위로 제대한 뒤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가택연금으로 바뀌었고 그나마 3년 뒤 닉슨 대통령의 특사로 풀려났다. 그 외에 처벌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양민 수백 명이 벼락처럼 들이닥친 좀비들에게 생목숨을 빼앗겼건만 멀쩡한 군인들을 좀비로 만들었던 책임자들은 종적이 묘연했지. 수십 년 뒤 미국 정부는 미라이 마을의 생존자들을 구한 휴 톰슨에게 훈장을 수여하며 “미라이는 미군 역사상 최대의 치욕”이라고 표현했지만 그 치욕에 책임을 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전쟁은 부도덕함보다 더 나쁘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It is worse than immoral, it’s a mistake)”라고 한 전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의 통찰이 뼈저리게 공감이 가는 대목이지.
2009년 8월19일 윌리엄 캘리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공개적으로 사과의 뜻을 밝혔다. “미라이에서 벌어졌던 일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은 날은 단 하루도 없다. (···) 학살된 베트남인들과 유가족들, 그리고 학살에 관여한 미군 병사들과 가족들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 하지만 그 사과에는 꼬리표가 달렸다. “나는 명령을 받는 소위였고 그래서 바보같이 그들의 명령에 따랐다.” 이 말을 들으며 아빠는 잠시 망연했다. 전쟁 자체가 범죄인 판에 ‘전쟁범죄’를 따지는 것이 큰 의미가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야. 더구나 국토 전역에서 수백 개의 미라이가 펼쳐졌던 한국전쟁의 역사를 가졌건만, 민간인 학살과 전쟁범죄를 ‘치욕’이라고 여기는 반성도, ‘미안하다’는 사과도 귀하디귀한 이 나라에서라면 더욱 그렇지 않겠니.
김형민 (SBS Biz PD)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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