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의 확장] 리 선생님을 추모하며 : 조선학교 선생님 이야기 첫 번째

김명준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사무총장/영화 <우리학교> 감독 2021. 3. 5.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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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회의 차별과 혐오에 맞서는 조선학교의 고군분투기

[편집자주][시선의 확장]은 흔히 '북한 업계'에서 잘 다루지 않는 북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코너입니다. 각 분야 전문가들이 그간 주목받지 못한 북한의 과학, 건축, 산업 디자인 관련 흥미로운 관점을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김명준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사무총장/영화 <우리학교> 감독© 뉴스1

(서울=뉴스1) 김명준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사무총장/영화 <우리학교> 감독 = 얼마 전에 어느 젊은 조선학교 선생님이 세상을 뒤로했다. 불과 40대 중반이었고 어린 세 자녀와 젊은 아내가 있었다. 둘 다 교원이었고 나와는 20년의 사귐이다.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 삿포로시에 자리한 '혹가이도 조선초중고급학교'*에서 교원을 시작한 둘은 조선학교 교원들이 보통 그러하듯이 사내 연애를 시작했다. 남자는 도쿄에서 조선학교를 다녔고 여자는 홋카이도에서 조선학교를 다녔다.

'교원' 즉, '조선학교 선생님'이 되기 위해서는 조선대학교 졸업이 필수다. 둘이 조선대학을 다니면서 서로 아는 사이였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심지어 결혼 발표 전까지 둘이 연애를 하고 있는지 아닌지조차도 주변에서는 거의 모른다.

철저한 비밀 유지. 젊은 청춘들이 연애 박사도 아닌데 주변의 지인에게 '연애 상담'이 없었을 리가 없다. 조선학교 교원은 일상이 너무 바쁘다. 출근, 수업, 소조*, 다음 날 수업 준비까지 정신없이 지내다 보면 저녁 10시쯤이다.

월급? 물론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박봉이다. 요즘은 월급을 받는 것 자체가 다행인 상황이다. 연애를 꿈꾸기엔 시간과 돈이 없어도 너무 없는 것이다. 그래도 사랑은 결국 어떻게든 이루어지기 마련인데, 그래서 조선학교 교원들은 직장 내 연애가 많고 교원 끼리의 결혼이 많을 수 밖에 없다.

조선학교 교원들의 연애에는 또 하나의 장벽이 있다. 이른바 '보수적인 동포사회'랄까. 일본 사회 자체가 보수적이요 남성 중심이기 때문에 그 영향을 70년이 넘게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다만 거기에 본국과의 교류가 오랫동안 원활하지 못한 관계로 굳어버린 1, 2세 동포사회의 보수성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본다.

2007년 혹가이도 조선초중고급학교 운동회 연습 중에 리 선생님과 아이들.(필자 제공)© 뉴스1

어쨌든 이 보수적인 동포사회의 영향이랄까. 교원들의 연애는 철저히 비밀 보장이 되는 편이다. 이유는 교원 사회라는 특성상 학생들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선생님의 연애 가십이 학생들 사이에 떠도는 걸 바람직하게 여기지 않는 문화 때문이다. 교원끼리는 알고 있어도 학생들과 동포들은 전혀 모르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결혼 선언'이 발표된다. "정말? 우와! 상상도 못 했다" "네 그럴 줄 알았어" "어쩐지~" 등등. 이 발표 후의 반응은 폭발적이다.

둘 다 초급부(조선학교는 초등학교라는 표현 대신 초급부라는 표현을 쓴다) 교원이었다. 결혼을 하자 여성은 교원을 그만두었다. 파트 타임으로 파칭코 였던가, 서빙을 한다고 들었다. 동포사회에서는 이것도 보통 있는 일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지나치게 박봉인 교원의 월급이다. 이제 아이도 생기고 새집의 대출금도 갚아야 하는데 교원 월급으로는 충당할 수가 없다.

누가 그만두는 게 맞는지는 결국 두 사람의 결정이겠지만 대체로 남성은 그대로 교원 생활을 계속하고 여성이 그만두는 편이다. 이 결정에 남존여비 사상이 없다고 단언하기 힘들지만, 지금에 와서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해 두자. 다만 둘 중의 하나는 무조건 교원을 그만두는 게 거의 법칙에 가깝다고 표현할 수 있다.

몇 년 후 이 가정은 홋카이도에서 이바라키라는 도쿄 오른쪽에 위치한 소도시로 이사했다. 남편의 직장이 '이바라기 조선초중고급학교'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교원들의 배치와 전근은 재일조선인총연합(이하 총련) 산하 교육국에서 담당한다.

배치와 전근의 원칙은 본인의 의지와 조직의 요구,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남편의 태생이 도쿄이니까 타지 생활을 접고 도쿄 근방으로 가고 싶었던 건지, 이바라키 조선학교에서 중견급의 초급부 교원이 필요해서 조직이 내린 결정인지는 알 수 없다.

2007년 혹가이도 조선초중고급학교 기숙사생들.(필자 제공)© 뉴스1

이바라키에서도 남편은 교원을 아내는 파트타임이라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 사이에 아이들 셋이 생겼고 무럭무럭 자라 첫째에 이어 둘째도 조선학교 초급부를 다니고 있었다. 4년 전쯤 이바라키를 찾았을 때다. 남편이 골수암 판정을 받았다는 거다. 상태가 호전되었다, 교원을 당분간 휴직한다는 등 간간이 소식을 듣다가 한 달쯤 전에 세상을 떠났다. 코로나로 막힌 하늘길 때문에 배웅을 하지 못한 게 두고두고 가슴에 남는다.

리씨 성을 가진 그 교원의 첫인상은 강렬했다. 180cm 정도의 키였을까? 그렇게 커 보였던 건 덩치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 큰 덩치에 얼굴색은 검었고 눈은 굉장히 작았으며 볼은 빵 두 개 정도는 넣어 놓은 듯 부푼 얼굴이었다. 말을 하면 벽에서 울림이 느껴질 정도의 저음이었다. 말수가 적었으므로 가만히 이쪽을 응시하면 '저 사람이 나한테 화가 났나?'라고 생각될 정도로 무서운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는 적어도 내게 있어 조선학교 교원의 모범 같은 이미지로 남아있다.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하고 싶다.

2004년이었다. 영화 <우리학교>를 찍을 때였다. 홋카이도 조선학교는 초중고 병설, 그리고 기숙사가 있는 학교였다. 신임 교원은 조건 여하를 막론하고 기숙사 사감을 맡아야 한다. 그가 기숙사 사감 시절이었으므로 교원이 된 지 2~3년 정도 되었을 때이겠다. 사감은 기숙사생들의 생활을 돌봐야 하니 기숙사 생활을 하는 게 당연하다.

초급부 3학년 담임이었고 상유와 윤택이라는 3학년 아이가 기숙사생이었다. 상유와 윤택이는 같은 방에서 지냈다. 그런데 초급부 내내 같이 지내던 상유가 어느 날 학교에서 보이지 않았다. 4학년이 되면서 일본학교로 전학 갔다는 거다.

이유는 모르겠다. 다만 상상은 할 수 있다. 10살짜리 꼬마가 부모님 곁을 떠나 사는 건 누가 보아도 무리다. 더구나 여기는 일본 사회다. 조선학교에 다니는 것만으로 차별과 혐오에 시달려야 한다. 부모로서는 아이의 미래를 걱정할 수밖에 없다. 어렵게 내린 결정이지만 매 순간 흔들리는 게 부모의 마음이다. 그렇게 한 번 떠나면 쉽게 돌아올 수 없는 게 조선학교다.

혼자 방을 쓰게 된 윤택을 위해 그는 자신의 방으로 윤택을 불러 같이 잠을 잤다. 방을 아예 옮긴 거다. 한참 20대 청춘이었던 교원은 하루 중 얼마 없는 개인 시간을 그렇게 학생과 함께 했다. 1년인가 2년인가 그 생활이 계속되었다. 여기서 끝난다면 이야기가 평범한 조선학교 교원의 학생 사랑 정도로 마무리될 것이다.

상유가 떠난 그다음 해 연중행사인 4월 초의 '합창경연대회'가 있었다. 조선학교의 입학 시즌은 4월 초다. 합창경연대회를 매년 4월 초에 진행하는 건 새 학년이 된 아이들의 단합에 특효약이다. 4학년 담임인 그가 아이들과 함께 준비한 노래는 다른 학년과는 사뭇 달랐다.

다른 학년은 저마다 자기 학급의 단합을 뽐내기 바쁜 곡들이었는데 4학년은 오로지 '상유야! 그립다! 우리는 너를 기다린다! 빨리 돌아오렴!'이라는 메시지로 가득한 노래였다. 이미 학교를 떠난 아이에게 왜 그렇게 집착하느냐고 물으니 "아닙니다! 상유는 반드시 돌아옵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리고 그 노래의 녹화본을 상유에게 보냈다고 한다.

그 후에도 이 학급은 운동회를 할 때나 학예회를 할 때도 빠짐없이 상유를 그리워하는 메시지를 담았다. 그리고 1년 후, 상유가 다시 조선학교로 돌아왔다. 그것도 동생을 데리고. -1이 +2가 된 사례다. 이런 사례가 다른 조선학교에도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드문 편이라는 사실은 확신한다.

2007년 혹가이도 조선초중고급학교 학생들의 공연 중에.(필자 제공)© 뉴스1

차별과 고립의 세월은 무리를 떠난 자에 대한 미련을 쉽게 버리게 한다. 아이들보다 어른이 포기가 더 빠른 법이다. 어른이 포기해 버리면 힘이 없는 아이들은 어쩔 수 없다. 소위 사회성을 그렇게 습득해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상유의 복귀'가 과연 그 교원의 설득과 끈기였는지, 아이들의 '성화'였는지 이미 고인이 된 사람에게 확인할 방도는 없다.

다만 홋카이도에서 그가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서 지었던 세상에서 가장 친근하고 멋있었던 미소와 4학년 학급의 면면을 살폈을 때 나는 그의 설득과 끈기 덕분이라고 믿는 편이다. 이 일화에는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조선학교의 교육 이념이 그대로 녹아있다.

그 사건은 나에게 하나의 기적 같은 순간이었다. 처음 조선학교를 만났을 때 나라고 해서 왜 '거부감'과 '두려움'이 없었을까? 30년을 넘게 머리와 마음속에 각인되었던 '반공'과 '반북'이 나에게도 충만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조선학교에서 지낸 그 3년 동안 이런 순간들이 차곡차곡 쌓였고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거부와 두려움은 말끔히 사라졌다.

지금 이 시각에도 조선학교의 선생님들은 일본 땅에서 몇 안 되는 '조선사람'을 키우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의 이야기가 이 모든 선생님들을 대신할 수는 없다. 다만 이 이야기를 시작하면서는 꼭 리 선생님을 추모하며 그에 관한 기억을 적어두고 싶었다. 코로나19를 핑계로 마지막을 배웅하지 못한 못난 친구가 내미는 변명이라고 생각해주면 고맙겠다.

*한글 맞춤법에 의하면 '홋카이도'가 맞으나 재일동포사회에서는 '혹가이도'로 쓴다. 필자의 뜻에 따라 가급적 고유명사의 경우 동포사회의 표기법을 따른다. *소조는 일본 식으로 표현하면 '부 활동'이다. 수업 후 진행하는 축구부, 농구부, 취주악부, 무용부 등이 있다. 조선학교는 이를 '소조 활동'이라 한다. 보통 운동 소조와 예술 소조로 나뉜다. 일본학교에서는 전문가가 코치나 지도를 하고 선생님은 '고문'을 맡지만 조선학교의 경우에는 지도와 고문을 선생님이 다 맡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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