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서의 글로벌 아이] 홍콩배우 故우멍다, 그의 파란만장 인생.."짜이지엔(再見)! 다수(達叔)"

박영서 2021. 3. 5.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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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기(西遊記) 월광보합(月光寶盒)' 중에서 오른쪽이 우멍다. 바이두 캡쳐
우멍다(오른쪽)와 저우룬파(왼쪽),바이두 캡쳐

저우싱츠(周星馳)와 명콤비를 이뤄 큰 인기를 누렸던 홍콩 배우 우멍다(吳孟達)가 간암으로 최근 사망했다. 향년 69세. '황금의 조연배우' '영원한 감초배우'로 불리며 저우싱츠와 함께 홍콩영화의 새 시대를 열었던 그가 떠나자 팬들은 깊은 아쉬움을 느낀다. 팬들은 그를 '다수(達叔·맹달 아저씨)' '다거(達哥·맹달 형)'로 부르며 추모를 이어가고 있다. 가난-명성-배신-파산-재기로 이어졌던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되돌아 본다.

◇나는 중국인이다=지난 2월 27일 간암으로 타계한 홍콩 배우 우멍다에 대해 중국 공산당 기관지들과 관영 매체들이 일제히 애도를 표했다. 이례적인 대우였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微博) 공식계정에 올린 글에서 "평생 조연으로 많은 캐릭터들을 만들어내 관객의 웃음과 눈물을 자아냈다. 어떠한 역에도 진지하게 임했다. 그 때문에 저우싱츠와 황금의 콤비를 이뤄냈다"고 찬사를 보냈다. 관영 CCTV도 "우멍다는 최고의 배우였다"면서 그를 기렸다.

그가 이같은 최고의 대우를 받은 가장 큰 이유는 '애국심' 덕분일 것이다. 2019년 8월, 홍콩 민주화 시위가 한창이었을 때 우멍다는 웨이보에 "나는 중국인이다"라는 글을 남겨 주목을 받았다. 우멍다의 이 글에 103만 명의 누리꾼이 '좋아요'를 눌렀고 댓글만 14만여 개가 달렸다. 실제로 우멍다는 중국에서 태어났다. 그는 1952년 1월 중국 푸젠(福建)성 샤먼(厦門)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7살 때인 1959년 부모를 따라 홍콩으로 이주해 빈민가에서 자랐다.

◇우멍다와 저우룬파(周潤發), 한때는 '철천지 원수'=우멍다는 어렸을 때 영화 보기를 좋아했다. 어머니가 장을 보라고 1위안을 주면 1마오를 남겨 모았다가 극장을 갔다. 그는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다. 스타가 되면 추앙도 받고 돈도 많이 벌기 때문이었다.

1973년 21살의 우멍다는 홍콩 방송국 TVB의 배우훈련반 3기 모집에 합격했다. 40명을 뽑았다. 저우룬파, 런다화(任達華)가 그의 동기다. 저우룬파는 꼴찌로 들어갔다고 한다. 졸업은 22명이 했다. 졸업성적 5등의 우멍다는 다른 6명의 동기들과 함께 TVB와 정식계약을 맺었다. 반면 저우룬파는 임시계약에 그쳤다.

1979년 우멍다는 TVB 드라마 '초류향전기(楚留香傳奇)'에 출연해 인기를 모으면서 유명인이 됐다. 자신감을 얻은 우멍다는 대만에 진출했다. 당시 대만에서 '초류향전기'는 장안의 화제였다. '초류향전기'가 방영되는 저녁 8~9시 때는 거리에 차가 없을 정도였다. 이런 인기 덕분에 우멍다는 1년 만에 미화 10만 달러를 벌었다. 그가 이렇게 잘 나가고 있을 때 저우룬파는 여전히 무명이였다.

하지만 우멍다는 술과 여자와 도박에 빠지기 시작했다. 도박으로 빚이 눈덩이처럼 블어났다. 노름빚이 30만 홍콩달러에 달했다. 인기는 급감했고 TVB의 눈 밖에 나면서 출연도 못해 극심한 경제적 압박을 받았다. 게다가 고리대금업 깡패한테 협박까지 받았다. 이때 그는 친구 저우룬파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당시 저우룬파는 '상하이탄(上海灘)'이 빅히트를 치면서 인기가 폭발하던 때였다.

하지만 예상 밖으로 저우룬파는 도움 요청을 단번에 거절했다. 우멍다는 절망했다. 배신감에 치를 떨며 파산을 신청했다. 그는 "극단적 선택을 하려했으나 베짱이 없어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바닥까지 추락한 그는 결심했다. 도박과 술을 끊고 최선을 다해 빚을 갚으면서 재기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절치부심, 닥치는 대로 일해 빚을 갚아 나갔다. 시간이 나면 항상 연기 연습을 했다. 마침내 반전의 기회가 왔다. 1981년 영화 '집법자(執法者)' 제작진이 찾아와 그에게 출연을 요청한 것이었다. 이 영화의 주연배우는 저우룬파였다. 이어 영화 '천약유정(天若有情)'에도 출연할 기회가 생겼다.

여러 해가 지나서야 그는 알 수 있었다. 그가 출연해 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은 저우룬파의 적극적인 추천 때문이었다. 후에 저우룬파는 우멍다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약 그때 내가 돈을 빌려주었다면 너에게 해를 끼친 것이나 다름 없었을 거야. 돈을 주었다면 너는 도박을 끊을 수 없었고, 특히 다시 일어설 수도 없었을 테니."

◇우멍다와 저우싱츠, 최고의 명콤비가 되다=우멍다가 홍콩 최고의 '감초 배우'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저우싱츠와의 만남 덕분이었다. 두 사람이 최초로 함께 출연한 작품은 1983년 드라마 '사조영웅전(射雕英雄傳)'이었다. 우멍다는 비중 높은 배역인 펑(彭) 장로 역을 맡았다. 저우싱츠는 시간당 10 홍콩달러를 받는 엑스트라로 나와 병사, 죄수 역을 맡았다.

두 사람이 정식으로 만나 본격적인 호흡을 맞춘 작품은 1988년 TV 드라마 '개세호협(蓋世豪俠)'이었다. 우멍다가 스승, 저우싱츠가 제자로 나와 열연했다. 이 두사람이 향후 홍콩 영화의 새 시대를 열게될 줄을 사람들은 아무도 몰랐다.

1년 후인 1989년 그들은 드라마 '타래자강호(他來自江湖)'에 함께 출연했다. 드라마는 호평을 받으면서 두 사람은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당시 그들은 바로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았다. 우멍다가 운전을 못해 저우싱츠가 항상 그를 태우고 다녔다. 한 부모 가정출신의 저우싱츠에게 우멍다는 '아빠 반', '형 반'이었다.

이듬해 두 사람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바꾼 영화가 탄생했다. 우멍다가 삼촌, 저우싱츠가 조카로 나온 '도성(賭聖)'이 4132만 홍콩달러라는 엄청난 흥행수입을 올린 것이다. 이는 홍콩 영화 사상 최고 흥행이었다.

대박을 터트린 두 사람은 잇달아 합작에 나섰다. 90년대 '희극지왕(喜劇之王)' '식신(食神)' '도학위룡(逃學威龍)' '녹정기(鹿鼎記)' '무장원 소걸아(武狀元蘇乞兒)' '구품지마관(九品芝麻官)' '백변성군(百變星君)' '심사관(審死官)' '서유기(西遊記) 월광보합(月光寶盒)' '서유기 선리기연(仙履奇緣)' 등 숱한 히트작에 콤비로 출연했다. 이는 2001년 '소림축구(少林足球)'까지 이어진다.

'소림축구'에서 우멍다는 한때 황금의 오른발이라고 불리던 전 축구선수로 나온다. 팀 동료에게 속아 부도, 명예도 잃은 채 완전히 몰락한 중년을 연기했다. 이 영화 이후로는 두 사람이 함께 출연한 영화는 없다. '소림축구'가 저우싱츠-우멍다 명콤비의 마지막 작품이 됐다.

두 사람이 함께 출연한 영화는 26편, 드라마는 3편이 된다. 두 사람은 20년 동안 서로가 톱니바퀴가 되어 맞물려 돌아갔다.

◇우멍다와 세 여자, 평생에 걸쳐 부양했다=홍콩 영화계의 간판스타가 된 후 우멍다의 1년 수입은 1500만 위안(약 26억원) 정도로 추정된다. 이런 큰 돈을 벌지만 나가는 돈이 워낙 많아 항상 일을 해야했다. 이유는 3명의 여자와 그 사이에서 낳은 다섯 자녀들을 부양해야 했기 때문이다.

1976년 우멍다는 마이리리(麥莉莉)와 첫 결혼해 쌍둥이 딸을 낳았다. 하지만 우멍다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다. 루샤오쯔(盧少慈)란 여배우였다. 두 사람은 동거에 들어가 1989년 딸을 낳았다. 그런데 새 여자가 또 등장했다. 1993년 우멍다는 말레이시아 출신의 여배우 허우샨옌(侯珊燕)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본처 마이리리는 1994년 우멍다와 이혼했다. 2년 후, 우망다는 허우샨옌과 정식으로 결혼한다. 결혼 후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두었다.

우멍다는 책임을 다했다. 3명의 여자들과 자녀들에게 집을 사주고 매달 생활비를 대주고 상속도 했다. 홍콩은 세계에서 집값이 가장 비싼 지역이다. 이 정도로 지원해주려면 돈이 한두푼 드는 것이 아니다. 그는 말년까지 열심히 일을 해야만 했다. "아침에는 류더화(劉德華)와, 오후에는 저우싱츠, 저녁에는 저우룬파와 촬영을 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하루 종일 일했다.

그는 2019년 중국 영화 '유랑지구(流浪地球)'를 찍다가 심장질환으로 몇 차례 쓰러졌다. 의사는 그에게 반 년 정도 요양하라고 권했지만 고개를 저으며 촬영을 끝냈다. 어떻게 보면 우멍다는 '세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일을 하다 지쳐 죽은 것일 수 있다.

우멍다는 주연 못지 않은 조연이었다. 출중한 외모나 화려한 액션은 없었으나 특유의 유머감각, 인간미 넘치는 웃음으로 관객들을 저절로 울고 웃게 만들었다. 그는 새롭고 재미있고 색다른 영화를 만들어 냈다. 연기는 그에게 있어 삶 자체였다. 박영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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