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광복회관 지하의 일식집

김은중 기자 2021. 3. 5.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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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재건축한 서울 여의도 광복회관 지하에 일식당이 하나 있다. 특급호텔 출신 셰프가 그날 가장 자신 있는 메뉴를 내놓는 이른바 ‘오마카세’ 집. 가성비가 꽤 괜찮다고 이름난 곳이다. 그런데 일식집 하면 으레 볼 수 있는 일본풍 옥호(屋號)나 인테리어를 찾아보기 힘들다. 말 한마디만 잘못해도 친일(親日) 딱지를 붙이기 바쁜 광복회장님 때문일까. 실제로 “광복회관 취지에 맞게 일본어 사용을 최소화하는 조건으로 입점했다”는 웃지 못할 얘기도 들린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광복회관./조선일보DB

문재인 정부 들어 당∙정∙청이 앞장서서 조장했던 반일(反日) 운동의 현주소가 이런 수준이다. 국내 정치를 위해 철 지난 친일 프레임을 들고와 편 가르기에 골몰하다 보니 요즘 유행하는 말로 ‘끔찍한 혼종’이 등장한다. 반일 불매운동의 직격탄을 맞은 일본 기업들 다수가 철수한 탓에 한국인 직원들은 졸지에 실업자가 됐다. 국제적으로는 외교 무대에서 고립되는 결과를 낳았다. 일본이 미국의 제1 가치동맹으로 쿼드(Quad) 같은 이니셔티브를 주도하고 있는 사이, 한국은 우방으로부터 한일 관계를 개선하라는 압박과 함께 ‘어느 편이냐’는 질문을 받고 있다. 2015년 위안부 합의, 1965년 청구권 협정도 사실상 파기하고 부정하는 한국에 대한 피로감, 이른바 ‘코리아 퍼티그(Korea fatigue)’만 커졌다.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겠다”(2019년 8월)던 문 대통령이 올해 3∙1절 기념식에서 재임 중 가장 진전된 대일 메시지를 냈다. “과거에 발목 잡혀 있을 수는 없다”며 “언제든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되어 있다”고 했다. 여당에서 보이콧 운운하던 도쿄올림픽을 두고는 “미∙북 대화 계기로 삼자”고도 했다. 맞는 말이다. 다만 임기 내내 대일 강경 노선을 고수하다 이제 와서 과거 자신의 잣대로라면 ‘토착 왜구’ 소리 들을 외교를 펴는 것에 대한 설명이 없다. 외교에 철학과 전략은 없고 국내 정치만이 있었음을 스스로 드러낸 것이다. 외교부 차관을 지낸 국민의힘 조태용 의원은 “갈팡질팡하는 대일 인식이 정신 분열적”이라고 했다.

이제라도 정부가 대일 외교의 중요성을 자각했다면 다행이다. 하지만 행동 없이 수사(修辭)에만 그친다면 또다시 국내 정치용이라는 비판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문 대통령까지 나서서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를 강조하고 나섰지만, 주무 부처의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카운터파트인 모테기 도시미쓰 일본 외무상과 한 달째 통화도 하지 않고 있다. “정상적 외교 소통은 이제 일본의 몫”이라고 한다. 그동안 국민들이 일식집 차려 놓고 양식집 코스프레 해야 하는 눈물 겨운 코미디를 감수하느라 고생했다. 국민은 물론 광복회장도 지하 일식집 가서 당당히 식사해도 된다. 이제는 위정자들이 한심한 수준의 반일 말고 양국 간 난제들에 대한 구체적인 액션 플랜을 내놓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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