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2040] “맨도롱할 때 호로록기 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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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6쪽 종이 사전 출간으로 결실
한땀 한땀 보내온 체험적 유산
100년 뒤에도 살아남아 울려퍼지길
강원도 춘천에 사는 변명수(61)씨에게 제주 방언은 가장 사랑하는 엄마의 언어다. 애월서 나고 자랐지만 제주대 졸업 후 고향 떠난 지 39년째. 그녀는 “지난해 말모이에 푹 빠져서 밤새는 줄도 모르고 제주 말들을 올렸다”고 했다. 끼니마다 먹던 촐래(반찬), 제사상에 올랐던 탕쉬(나물무침), 친구들과 하던 곱은재기(숨바꼭질)···. “맨도롱할(따뜻할) 때 국 한 사발 호로록기 먹고” “도르멍(빨리) 도르멍 뛰어오라게” 하던 유년 시절 엄마 목소리까지, 잊지 않고 기억했다는 게 신기했다고 했다.
조선일보 창간 100주년을 앞둔 2019년 10월 말모이 운동을 시작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순우리말, 옛말과 입말, 구수한 방언을 온 국민이 함께 모으는 작업이었다. ‘말모이’는 1911년 주시경 선생이 시작한 최초의 우리말 사전 원고 이름. 독립운동가이자 국어학자인 주 선생은 우리말과 글을 빼앗기면 민족의 정신과 문화도 말살된다고 믿었다. 선생 사후 원고를 이어받은 조선어학회가 일제의 탄압을 뚫고 해방 직후 ‘우리말 큰 사전’을 완간했다.
그로부터 100년 뒤 펼친 말모이 운동은 우리말과 글을 목숨 걸고 지킨 선현들의 얼을 다음 세기로 이어가는 여정이었다. 다만 수집 방법은 그때와 달랐다. 21세기의 말모이는 인터넷이 중심이 됐다. 누리집(malmoi100.chosun.com) 공개를 앞두고 취재팀은 여러 날 밤잠을 설쳤다. 게시판이 썰렁하면 어쩌나, 사전에 없는 단어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기우였다. 누리집이 열리기 무섭게 단어들이 올라왔다. “내가 죽으면 내 자식도 모를 이 말들이 사라지는 게 안타까워서” “떠나온 고향의 말이 사무치게 그리워서” “표준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길이 없는 말이라서”. 암각화처럼 몸에 새겨진 말들이 흘러 나와 ‘말모이’라는 곳간에 차곡차곡 쌓였다.
1년 넘게 전국 각지를 취재하며 말모이 여정을 함께했다. 전남 고흥에선 비가 ‘보슬보슬’ 내리지 않고 ‘사울사울’ 온다. 고흥 토박이 신정자(78) 할머니는 ‘소나기가 겁나 퍼붓는다’ 대신 ‘작달비가 짜락짜락 떨어진다”는 고흥말을 가르쳐줬다. 옛날 충남 아이들은 ‘숨바꼭질’을 하지 않고 ‘감추기장냥’을 했다. “감추기장냥 헐 사람 요기요기 붙어라” 하는 식이다. 낱말과 함께 사라진 시대 풍경도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1950년대 영·유아 사망률은 1000명당 138명. 갓 태어난 아이가 세상을 떠나는 일이 많았다. ‘붙들이’와 ‘땇줄이’ ‘쇠줄이’ 같은 이름이 이런 상황에서 생겨났다. 통영말 고수 김성재씨는 “‘닻'을 뜻하는 경남 방언이 ‘땇’인데 배가 정박할 때 닻을 내리듯 이 세상에 닻을 내리고(땇줄이), 목숨을 쇠줄처럼(쇠줄이) 꼭 붙들라(붙들이)는 의미”라고 했다.
한땀 한땀 모아주신 여러분들의 체험적 유산이 ‘말모이’ 종이 사전으로 탄생했다. 1년간 모인 10만여 우리말 중에서 전문가 검수를 거쳐 추린 4012개의 표제어를 656쪽에 담았다.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손끝에 감기는 종이의 감촉이 읽는 재미를 더한다. 누구나 검색만 하면 단어를 찾을 수 있는 시대, 검색으로도 찾을 수 없었던 이 단어들이야말로 삶의 최전선에서 건져 올린 귀한 말들의 뭉치다.
말의 별들이 모여 이룬 미리내가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가치에 새롭게 눈뜨고, 단절됐던 세대 간의 소통을 잇는 창구가 됐으면 좋겠다. 100년 뒤에도 이 귀한 말들이 살아남아 누군가의 밥상에서, 학교와 일터에서 발음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소설가 김훈이 머리말을 보내왔다. “개인의 삶 속에 자리 잡은 낱말들의 무늬와 숨결을 모아놓고 보니, 말들은 개인의 생애에 갇히지 않고 공동체 속으로 퍼져나가서 겨레의 언어로 모인다.(···) 말들아, 모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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