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준의 가타부타] 탈진실 시대, 공부하는 이유

최병준 후마니타스연구소장·논설위원 2021. 3. 5.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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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책장에 오랫동안 박혀 있던 책에서 아버지의 메모를 발견했다. 아버지가 책 속에 나온 구절을 필사한 것이다. 얼추 7~8년 전쯤이었다. “요즘 읽을 만한 책 좀 없냐?” 아버지의 요청에 추천한 책이었다. 그때 아버지 나이가 여든 안팎. 아버지는 지금도 틈만 나면 컴퓨터를 익힌다.

최병준 후마니타스연구소장·논설위원

사람은 누구나 배움에 대한 욕망이 있다. 앎에 대한 욕망은 본능이다. 앎이 생존 기회를 넓혀주었기 때문이다. 성에 대한 욕망은 나이가 들수록 줄어들지만, 배움에 대한 욕망은 다르다. 중년이나 노년의 나이에도 불쑥 솟구쳐 오른다. “세상은 변하고 있는데 잘 살고 있는 것일까?” “젊은이들의 생각은 왜 이렇게 다를까?” 이런 생각에 사람들은 다시 공부하고 싶어 한다. 늦게 하는 공부는 먹고사는 데 필요해서가 아니라 좋은 삶을 위해서 한다. 인간은 여느 생물종과 달리 시대와 소통하는 삶, 의미 있는 삶을 위한 욕망이 있다.

더구나 탈진실 시대에는 공부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탈진실이란 진실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확증편향에만 매몰돼 자신의 잣대로만 세상을 재고 판단한다는 것이다. 정치·사회적 사건은 단순하게 선과 악의 대결구도로 진행되지 않는다. 어느 쪽이든 일부 맞는 구석이 있고, 편의적 해석에 따라 그럴싸하게 들린다. 그렇기에 실체적 진실을 좇기보다는 자신이 응원했던 사람의 주장이 맞을 것이라고 믿는다. 보수든 진보든 진영을 좇는다. 진영주의가 머릿속에 박히면, 편에 따라 정의와 부정의가 나뉜다. 실체를 보지 않고 사람을 본다.

“내가 부둥켜안고 왔던 생각들이 맞는가?” “그동안 외쳐왔던 개혁은 왜 아직도 이뤄지지 않고 있는가?” 살다 보면 이런 의문이 불쑥 솟구칠 때가 있다. 이에 대해 신영복은 “모든 사상이 갖는 한계란 실상 완성된 체계에 도달할 수 있는 조건이 역사적으로 제약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상은 스스로 태어나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 속의 관계망 속에서 움트고 자란다. 시간이 흐른다고 사상의 가치가 변하지 않지만, 사람마다 절박하게 받아들이는 시대적 과제의 우선성은 다를 수 있다.

공부란 관계성에 대한 성찰이다. 단순히 지식을 머릿속에 구겨넣는 게 아니라 자연과 사람, 사회와 세계의 관계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정의론을 이야기할 때 아이리스 영은 단순한 분배 차원이 아니라 맥락과 관계 속에서 보아야 한다고 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다. 신영복은 <강의>에 이렇게 썼다. “사람의 생각을 결정하는 것이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라는 뜻이지요. (중략) 가슴을 강조하는 것은 가슴이 바로 관계론의 장(場)이기 때문입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다시 손과 발로 이어지는 게 공부다. 찾아가서 손을 내미는 실천으로까지 이어져야 하는 게 공부란 의미다.

공부는 나이 들어서도 멈출 수 없다. 움직이지 않는 것들은 굳기 때문이다. 생각도 그렇다. 무비판적으로 가슴 한가운데 모셔놓은 것이 우상이다. 공부는 이 우상을 부수는 작업이다. 그래서 자신에 대한 채찍질일 수밖에 없다. ‘우상 파괴’에 앞장섰던 리영희는 글을 쓰는 이유 중 첫째가 “자유롭게 생각하고 판단하는 재량을 지니는 자율적인 인간의 창조를 위하여”라고 했다. 간단하게 말하면,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공부해야 한다. <논어>는 말한다. 학이불고(學而不固). 배우면 완고해지지 않는다.

공부는 삶과 사회의 관계망 속에서 자신의 좌표가 어디인지 알기 위해 한다. 미셸 마페졸리는 <부족의 시대>에서‘망치를 들고 철학하라’는 니체의 말을 인용하면서 68세대를 신랄히 비판했다. 68세대는 레지스탕스 전쟁영웅 드골을 물러나게 했던 68혁명의 주역이다. 마페졸리는 “이 세대는 자신에게 권력을 가져다준 철학-정치의 처방들을 되풀이하는 데 만족한다”고 썼다. 세상을 다 채우고 있는 물도 뒤 물에 밀린다. 인간은 자신이 성취한 것이 아니라 도전과 좌절, 노력과 인내, 기쁨과 슬픔 등을 아우르는 총체적인 삶을 통해 존엄함을 느낀다. 좋은 세상에 대한 신념을 붙들고 살다가 갑자기 자신이 세계로부터 소외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사람은 자존감이 상하고 슬픔을 느낀다. 공부는 새 물결에 맞서기 위해서가 아니라 휩쓸려 떠내려갈지라도 거기에 접속해 제 나름의 생각대로 받아들이거나 비판하기 위해 한다. 삶의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왔다 간다. 사회·경제적 배경도 세월 따라 바뀐다. 공부는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알기 위해 한다.

최병준 후마니타스연구소장·논설위원 b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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