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대학 연구 2.0을 제안한다

김명희 2021. 3. 4.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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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욱 서울대 과학사및과학철학협동과정 교수

대학은 더 이상 상아탑이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 대학의 역할은 고등교육을 제공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사실 '고등' 교육기관으로서 대학의 역할도 희석된 지 오래다. 20세기 후반 들어와 세계 주요 국가에서 예외 없이 대학 교육이 대중화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대학 진학률이 70.4%(2020년)에 이른다. 국민 10명 가운데 7명, 고등학교 졸업자 가운데 약 8명이 대학에 가니 고등교육이란 '중등교육' 다음의 단계를 지칭할 뿐이다. 기술과 사회 변화가 빨라지면서 대학에서 배운 지식의 유효기간도 짧아지고 있다. 일하는 데 필요한 실질 지식과 직능은 직장에서 배운다. 평생학습 개념이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다. 대학의 존재 의의는 무엇인가.

중세 유럽에서 대학이라는 제도가 탄생한 이래 수백년 동안 대학 기능은 지식 전수, 즉 교육에 국한됐다. 근대 과학혁명 시대에 이르러 대학에서 연구가 시작되고, 지금도 남아 있는 여러 제도 장치(실험실, 세미나, 박사 논문과 학위, 대학 운영체제)가 자리를 잡았다. 19세기 당시 후발 산업국이던 독일은 대학의 산업경제 관점에서의 '쓸모'에 주목하였다. 산업 부문과 맞닿은 공학 전공 등 전문 인력 양성 역할이 대학에 부여되고 교육과 연계하기 위해 지식생산, 즉 연구가 강조됐다. 이 대학 모델은 미국을 비롯한 서구 국가에 역으로 전파됐다. 대학은 전문 인력뿐만 아니라 교양있는 민주시민을 양성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미국 중심으로 대학 기초연구가 중시됐다. 1980년대부터 대학의 연구 성과를 기술 혁신과 상업화로 연결해야 한다는 규범이 득세하게 된다. 현재 대학은 교육과 연구 주체일 뿐만 아니라 직접 혁신을 창발하고 지식재산을 팔아 돈을 벌며, 대학 구성원이 기술을 밑천으로 창업한 회사들을 자회사로 거느리는 경제 주체다. 젊고 진취성 강한 예비 창업가들이 대학 연구실과 가까운 곳에 모이면서 캠퍼스 주변에 벤처타운이 들어서고, 지역사회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대학이 경제사회 생태계 허브인 셈이다.

세계 유수 대학들은 숨 가쁘게 진화하고 있다. 우리나라 대학들은 어딘지 모르게 몸이 무거워 보인다. 대학의 자성과 혁신 노력이 필요하다. 정부 정책도 대학의 진화를 촉진하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 물론 산·학 연계를 위한 사회맞춤형산학협력선도대학(LINC) 사업, 연구 역량 강화를 위한 두뇌한국(BK)21 사업, 각종 대학창업지원 사업 등 많은 정책 노력이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대학 정책의 초점은 여전히 입시와 학부 교육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학 과학기술 연구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상당 부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연구개발(R&D) 수행 부처들을 통해 이뤄지고 있지만 대학 연구와 기술사업화의 중추인 산학협력단을 비롯한 대학 정책은 엄연히 교육부 소관이다. 대학 연구행정을 연구자 친화형으로 개선하는 것, 기술사업화와 창업 역량을 강화하는 것 모두 교육부 협조가 필요한 사안이다. 차기 정부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행정체계를 정비할 필요가 있다.

대학에서 수행되는 정부 R&D의 경우 교수가 경쟁을 통해 연구 과제를 수탁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이른바 '연구의 시장화' 현상이다. 연구 시장에서 대학은 교수의 소속기관일 뿐이며, 학생과 실험실과 기자재를 교수 연구에 내어 주고 간접비를 받아 가는 기관일 뿐이다. 대학별 특성화나 전략 분야 연구, 나아가 이를 교육과 연계하는 데 대학 스스로 무언가 하는 것에 필요한 힘도 자원도 제한될 수밖에 없다. 학령인구 감소에 따라 고등교육 기관으로서의 경쟁력을 점차 상실하는 대학이 늘어 갈 것이다. 정부는 대학재정지원사업을 통해 부실 대학 정리, 살아남을 대학의 개선 등 연착륙을 꾀하고 있다. 대학에 대한 재정 지원과 연구비 일정 부분을 대학의 연구 역량 및 수행 규모를 반영해 묶음예산(포괄보조금)으로 지원하고, 각 대학이 자율 배분해서 사용토록 하면 어떨까. 그렇게 하면 각 대학이 알아서 전략 분야 연구를 강화하고, 학과 간 칸막이를 없앤 융·복합 연구를 시도하고, 대학 연구의 공공성을 회복하고, 연구비 시장에서 소외된 기초학문 분야를 지원할 수 있을 것이다. 묶음예산 증액을 위해 대학들이 우수한 연구 성과를 내기 위해 경쟁하고, 연구 성과를 사업화해 수익을 다시 연구에 투자하는 선순환 구조가 생길 것이다.

박상욱 서울대 과학사및과학철학협동과정 교수 sangook.park@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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