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봐도 좋지만 지금 보면 더 좋은

김세윤 2021. 3. 4.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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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나를 지나갔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

당신도 보았느냐고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지만

그것은 이미 그곳에 없다.

회색빛 밤하늘 아래 마주 선 두 그림자는, 그래서 더욱 애달프다.

무언가 당신을 지나갔는데 그게 뭔지 모를 때, 손가락을 들어 지난날을 가리키지만 그것은 이미 그곳에 없을 때, 그렇게 막연한 비행운(飛行雲) 한 줄기가 문득 마음을 가로지를 때, 그땐 나처럼 영화 〈먼 훗날 우리〉에 담긴 열두 번의 설을 다시, 같이 쇠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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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훗날 우리〉
감독:유뤄잉
출연:징보란, 저우둥위, 톈좡좡

무언가 나를 지나갔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 당신도 보았느냐고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지만 그것은 이미 그곳에 없다. - 김애란 소설집 〈비행운〉 ‘작가의 말’ 중에서

비행운. 까닭 없이 떠오른 말인 줄 알았는데 까닭이 있었다. 영화 〈먼 훗날 우리〉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여름 한복판에서 이 영화를 처음 만났을 때, 난 이상하게 김애란 소설의 주인공들을 떠올렸다. 악착같이 붙들려고 애쓸수록 속절없이 놓쳐버리는 것투성이 인물들이 영화 속으로 굴러 떨어지는 상상을 했다.

2007년 섣달 그믐, 고향 가는 기차에서 둘은 처음 만났다. 차표를 찾지 못해 당황하는 여자 팡샤오샤오(저우둥위)에게 선뜻 자신의 표를 건넨 남자 린젠칭(징보란). 알고 보니 둘은 고향이 같았다. 더 알고 보니 지금은 베이징에 둥지를 튼 처지인 것도 같았다. 고향이 갑갑해서 큰 도시로 떠났는데 비좁은 방에 갇혀 더 갑갑해진 청춘인 것도 같았다. 서로 같은 게 많아 의지가 되었다. 서로 다른 것도 많다는 게 그때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2018년 설날을 앞두고 베이징 가는 비행기에서 둘은 다시 만났다. 남자는 비즈니스석에서 뒤를 돌아보았고 여자는 이코노미석에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전엔 춘절(설날)을 쇠러 정신없이 고향에 내려갔는데 이제는 반대로 베이징으로 가네.” 여자의 말에 남자가 되물었다. “넌 베이징이 고향 같나 봐?” 폭설로 비행이 취소되고 둘은 같은 호텔에 묵는다. 방 안 가득 어색한 침묵이 성에처럼 낀다.

이때부터 영화는 이야기 두 개를 번갈아 들려준다.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는 지난날의 이야기가 하나, 다시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는 현재의 이야기가 하나. 기차 선로처럼 나란히 뻗은 두 이야기를 타고 달려 내 마음 깊숙이 들어와버린 영화.

대개는 과거가 흑백, 현재가 컬러로 담기지만, 이 작품은 반대다. 헤어진 뒤의 삶이 흑백, 함께한 그때가 컬러다. 파란 청춘의 시간에 하얀 비행운처럼 새겨진 ‘버티는 삶’의 흔적들은, 그래서 더욱 새삼스럽다. 회색빛 밤하늘 아래 마주 선 두 그림자는, 그래서 더욱 애달프다.

여느 때와 다른 흑백의 시간이었으니까

무언가 당신을 지나갔는데 그게 뭔지 모를 때, 손가락을 들어 지난날을 가리키지만 그것은 이미 그곳에 없을 때, 그렇게 막연한 비행운(飛行雲) 한 줄기가 문득 마음을 가로지를 때, 그땐 나처럼 영화 〈먼 훗날 우리〉에 담긴 열두 번의 설을 다시, 같이 쇠어도 좋을 것이다. 그들을 흔들어놓은 숱한 비행운(非幸運)의 끝에서 당신이 흔들어 떨어뜨린 삶의 어떤 행운(幸運)을 다시, 혼자 되새겨도 좋을 것이다. 2018년 넷플릭스로 공개된 이 영화는, 언제 봐도 좋지만 지금 보면 더 좋을 것이다. 여느 때와 다른 설날이었으니까. 생기를 잃은 흑백의 시간이었으니까. 악착같이 거리를 좁히려고, 필사적으로 다시 가까워지려고 애쓰는 설날의 연인들이 어쩌면 더욱 애달플 테니까.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FM영화음악 김세윤입니다 〉진행자)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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