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이제 엄마가 한국말을 잘해요"

안정선 2021. 3. 4.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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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졸업식도 교실에서 방송으로 조촐하게 진행됐다.

깜짝 놀라서 "정말? 어떻게? 어디 한국어 교실 같은 데 다니셨나?" 했더니 "아니요. 작년에 선생님이 주신 책, 그거로 저랑 공부했어요" 그러는 게 아닌가! 네이구르는 나와의 약속을 지켰던 것이다.

나의 한국어 제자 1호, 네이구르의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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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성 그림

올해 졸업식도 교실에서 방송으로 조촐하게 진행됐다. 나는 마음으로나마 정갈한 옷을 갖춰 입고 꽃다발을 들고 참석해 진심 어린 축하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담임도 맡지 않았건만, 지난해에 3학년을 가르치지도 않았건만, 졸업만으로도 가슴이 벅찬 학생이 셋이나 있기 때문이다.

치명적인 귀여움을 장착한 외모 때문에 도저히 미워할 수 없었지만 온갖 골치 아픈 짓을 도맡아 했던 녀석 하나. 그 아이의 졸업식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마음이 뭉클하던 아픈 손가락. 그리고 우리 학교를 자그마치 5년이나 다닌 또 한 녀석도 드디어 졸업을 한다. 학교에 오기 싫어해 학년말 번번이 하루나 이틀을 남겨놓고 출석일수 부족으로 유예 처리가 되곤 하던 그 ‘형아’는 코로나 시대 원격 수업 덕에 집 밖을 거의 나오지 않고도 출석일수를 채울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아이, 몽골에서 온 네이구르(가명)도 이번에 졸업을 했다. 중1에 입학할 당시 한국어 구사 능력이 초3 정도도 되지 않아서 2년 동안 방과후수업으로 한국어를 가르친 학생이다. 2009년에 취득했지만, 원어민 교사에게 ‘안녕하세요’와 ‘안녕히 계세요’의 차이를 설파한 이후 개점휴업이던 나의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사 자격증’을 제대로 활용하게 된 첫 번째 제자이기도 하다.

한국말도 서툴고 친구도 잘 못 사귀던 그 아이를 위해 1학년 어느 국어 수업 시간에 ‘네이구르와 함께하는 몽골어 수업’을 했다. 학습지에는 교과서 단원에 나오는 단어들을 죽 늘어놓고 한국어와 몽골어를 쓸 칸을 만들어놓았다. 가령 ‘새벽을 몽골어로?’ 하고 질문하면 그 아이가 ‘уур цайх(üür tsaikh)’라고 발음하고 다른 친구들이 따라 하며 학습지를 채우는 식이다. 늘 한국어를 못한다고 교실에서 소외되던 네이구르였지만 그날만은 어려운 몽골어 발음을 따라 하느라 식은땀을 흘리는 친구들 앞에서 당당하게 모국어를 말할 수 있었다.

어느 정도 기본적인 소통이 가능해진 2학년 때는 〈이주여성을 위한 한국어〉 책을 사서 건네며 주말마다 어머니께 한국어를 가르쳐드리는 과제를 내주었다. 사실 과제를 잘하리라는 기대는 없었다. 어머니는 어렵사리 취업을 해서 평일에도 늦게 오신다 하고 네이구르도 자신의 과제를 수행하기도 벅차 했으니까.

작년에 선생님이 주신 책

그런 네이구르를 작년 겨울방학 전에 만났다. 2학년 때 공부하던 교재와 〈바늘장군 김돌쇠〉, 필기구 세트 등 이런저런 선물을 건네주며 졸업 축하한다고, 고등학교 가서도 건강하게 생활하라는 말을 전하고 마지막 과제로 〈행복한 왕자〉를 건네며 시간이 나면 어머니 옆에서 소리 내어 읽어드리라고 했다. 그런데 그때 그 아이가 “선생님, 이제 엄마가 한국말을 잘해요” 그런다. 깜짝 놀라서 “정말? 어떻게? 어디 한국어 교실 같은 데 다니셨나?” 했더니 “아니요. 작년에 선생님이 주신 책, 그거로 저랑 공부했어요” 그러는 게 아닌가! 네이구르는 나와의 약속을 지켰던 것이다. 진심으로 아이에게 고마웠다. 그 책이 그냥 책상 한구석에서 제구실을 못하고 꽂혀 있을 거라고 상상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울 만큼.

네이구르, 외국에 와서 힘든 일 많았을 텐데 씩씩하게 잘 커줘서 정말 고맙다. 먼 훗날 널 놀렸던 아이들도, 따라잡기 힘들었던 공부도, 농구할 때 불어오던 바람결에서 느꼈던 몽골 초원에 대한 그리움과 말달리기에 대한 갈증도 다 추억이 되어 돌아볼 수 있다면 좋겠다. 나의 한국어 제자 1호, 네이구르의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안정선 (경희중학교 교사)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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