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신세대 탈북민들의 증언 / 김종대

한겨레 2021. 3. 4.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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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김종대 ㅣ 연세대 통일연구원 객원교수

중국, 러시아를 거쳐 올해 한국으로 넘어와 정착한 40대 초반의 탈북 남성을 만났다. 필자가 자기소개를 하자 “이미 유튜브로 여러 번 보아서 잘 안다”고 말을 하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국회의원 시절 대정부질문이나 방송에 출연해서 한 말들을 대부분 기억하기에 더 그랬다. 남쪽의 정치인들이 북한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지 궁금해서 해외에서 동영상을 자주 시청했다고 한다. 또 다른 30대 초반의 탈북 남성은 2년 전에 압록강을 건너던 날 밤을 잊지 못한다.

무언가 소중한 것을 두고 간다는 느낌에 자꾸 고향 쪽을 되돌아보게 되더라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한국에 와서 지금은 대학에서 행정학을 공부하고 있다. 이들은 배고픔이나 차별 때문에 북한 체제로부터 튕겨져 어쩔 수 없이 탈북을 감행해야 했던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신세대다. 어릴 적에 극한의 식량 위기 속에서 고난의 행군을 목격했으며, 그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완화된 사회통제 속에서 초보적인 시장경제를 경험했다. 자유와 책임의 원리를 어렴풋하게나마 학습한 사람들이다. 최근 국내에 정착하는 탈북민의 수는 크게 줄었지만 지금 넘어오는 탈북민들은 비록 소수라도 남한 체제의 좋고 나쁜 것을 다 파악한 ‘똑똑한 이주민’이다. 개인의 자율적인 판단에 따라 스스로 경계선을 넘었으며, 지금은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보다 새로운 희망을 필요로 한다.

이들이 남한 사회를 잘 안다고 해서 남한 체제에 다 녹아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개인 능력에 따라 서열이 정해지는 경쟁의 사다리에서 자신의 지위가 추락할까 봐 두려워하는 집단불안의 정서는 남한의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현상이다. 청소년 시절부터 경쟁의 압력에 시달리고 자존감에 상처를 입어 심리치료를 받아야 하는 남한을 보면 정신적으로는 북한 주민이 더 건강한 것 같다. 우울증과 공황장애에 시달리는 상실의 시대, 은밀하게 확산되는 실존의 위기는 허울뿐인 자유의 값비싼 비용이다.

이에 비해 만약 배급체계가 잘 작동하고 생필품이 그럭저럭 보급된다면 전체주의야말로 아주 편안한 체제다. 국가가 원하는 노력만 하면 생존은 국가가 책임져주기 때문에 개인은 실존의 위기를 겪지 않아도 된다. 집단 우선의 원리에 순치된 사람들에게 가장 큰 형벌은 개인의 자유를 선사하는 것이다. 자유는 자유를 누리고자 하는 사람에게만 축복일 뿐, 그것이 뭔지 모르는 사람에게는 불안일 뿐이다. 자유민으로 살지 않았던 대다수 북한 주민들은 남한이 잘사는 것을 알고 있지만 자존심까지 버리면서 남한을 부러워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니 외부에서는 북한 체제가 경제난에 처하면 곧 붕괴한다고 떠들지만 아직 북한 주민들에게서는 혼란의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이 점에서 북한의 전체주의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성공한 체제였다.

그러나 앞으로는? 국제제재와 방역으로 닫힌 북한 체제는 만성적으로 공급부족에 시달리고 있고, 올해 어려움은 배가될 전망이다. 북한 정권은 체제 결속을 다지기 위해 당 간부들에게 사상교육과 도덕교육을 강화하고, 특히 ‘장마당 세대’라고 불리는 신세대 간부들에게 교육을 집중하고 있다. 과거와 같이 당과 수령에게 충성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20~30대 간부들을 통제할 수는 없다. 무언가 이익을 제시해야 하는데 그게 어려우니까 더 많은 충성을 요구하며 통제한다. 북한 체제의 최대 취약점은 물질적 풍요와 자유에 민감한 신세대 간부들이다. 이들은 2년여 전에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 능라도경기장의 5만 군중 앞에서 평화를 역설하던 모습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북한의 신세대에게도 대단한 충격이자 새 시대의 희망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그때는 마치 새로운 세상이 온 것 같았는데, 지금은 남북관계 악화와 경제적 어려움이 기다린다. 그렇다면 그때 왜 문재인 대통령을 초청해서 그 야단법석을 떨었는가? 이들은 자신의 당 지도부에 의문이 있다.

우리가 북한 체제를 변화시키려면 바로 이 점에 주목해야 한다. 남한은 북한의 똑똑한 신세대에게 2년 전의 그 희망을 수출해야 한다. 군사적 압박만이 아닌 제대로 된 희망 말이다. 북한에 물질적 번영과 개인의 행복의 가능성을 전하는 일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북한 내에서도 개혁의 주체가 될 신세대들은 서서히 희망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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