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 산행/광양 백운산] 매화 없는 매화산행, 텅 빈 산의 위로

글 신준범 차장대우 2021. 3. 4.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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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정맥 최고봉 당일 산행.. 백운사~정상~신선대 거쳐 진틀 방면 하산
하늘에서 본 백운산 정상. 눈 쌓인 북사면과 햇볕이 내리쬐는 광양과 여수 앞바다 일대가 겨울과 봄의 경계에 있음을 알려준다.
매화가 없다는 걸 알면서 매화마을로 갔다. 허리 굽은 노인들이 검은 뼈대만 남아 무언가 골똘히 추억하고 있었다. 고집스럽게 한 가지로만 기억을 밀어내고 있었다. 기괴한 열망으로 뻗어낸 가지는 아름답지 않았다.
매실을 얻기 좋도록 만들어진 낮고 멀리 뻗은 가지들, 앙상한 관념으로 온 산이 덮여 있었다. 겨울바람이 세차게 불어 댈 때마다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침묵의 숙명을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듯 무언가 털어놓고 싶은 걸 안으로 꾸역꾸역 삼키고 있었다.
매화 없는 쫓비산은 작은 야산 느낌이다. 멀리 남도까지 와서 경치 없는 육산만 올랐다 가기엔 아쉽다. 산행지를 바꿔 제왕의 철옹성으로 향한다. 높이 1,222m 호남정맥 최고봉이자 광양의 제왕인 백운산으로 갔다. 동곡리에서 백운사를 거쳐 주능선으로 향한다. 간밤에 눈이 내렸으나 남사면은 흙이 말라 있다. 백운사를 잇는 길은 포장 공사가 한창이라 어수선하다. 승용차로 주능선 부근 상백운암까지 오를 날도 머지않았다.
잔설이 남아 있는 해발 1,100m대 주능선을 주파하는 최수연·최동혁씨.
연세산악회 재학생인 최동혁·최수연씨의 얼굴에 미소가 감돈다. 지루했던 임도의 끝이다. 해발 1,023m에 자리한 정갈한 고산 암자 상백운암에 닿자 멀리 광양 앞바다가 빛나고 있었다. 한없이 맑은 하늘과 수천 년을 흘러내렸을 산줄기의 깊이 있는 실루엣. 흑과 백으로 뻗은 산줄기의 겹쳐짐이 작품이다. 저토록 한국적인 선이 있을까, 역시 우리나라는 산의 나라다.
상백운암 해우소에서 근심을 비우고, 비탈에 몸을 던진다. 싱겁게 끝난 산길 끝에서 백운산 정상을 만난다. 주능선 헬기장 맞은편으로 불끈 솟은 정상부, 무채색에 가까운 앙상한 계절이지만 흙과 바위가 절묘하게 섞여 압도적인 힘을 뿜어내는 듯 강력한 모습이다.
신선이 된 듯 탁월한 산경이 드러나는 신선대.
짧은 신호등이 빽빽이 늘어선 지방도로를 지나 이제야 뻥 트인 고속도로에 오른, 8기통 엔진의 포르쉐가 된 기분이다. 마음껏 흙길을 밟으며 1,100m대 능선을 여한 없이 걷는다. 임도를 오르는 내내 부자연스러웠던 하이컷 가죽 중등산화가 물 만난 고기처럼 지면과 하나가 된다.
잔설에는 야생짐승 발자국이 보인다. 삵 또는 너구리 발자국인 듯하다. 백운산은 온대에서 한대에 이르기까지 식물 1,000여 종이 자생할 정도로 식생이 우수하며, 하늘다람쥐와 수달을 비롯해 너구리, 삵, 멧돼지, 고슴도치, 두더지, 멧토끼 등 15종의 포유류가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굿거리에서 자진모리로 장단이 바뀐다. 주능선에 닿기만을 고대하던 더딘 걸음이, 능선의 곡조에 덩실덩실 춤을 춘다. 오르내림 반복되던 능선이 서서히 하늘과 가까워진다. 마주 치는 사람 한 명 없는 앙상한 계절의 산은 고즈넉해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기에 제격이다. 겨울과 봄 중간 어디쯤으로, 마음도 함께 흘러간다.
백운산 정상 암릉지대. 안전한 계단이 있으나 찰진 바위맛을 보기 위해 잠깐 모험을 감행했다. 뒤쪽 툭 튀어나온 암봉이 신선대이다.
저 매화에 물을 주라
정상 직전, 한창 달궈진 걸음을 부여잡는 건 뻥 트인 쉼터다. 섬진강 방향으로 트여 있어 하동읍내가 드러난다. 저 아래 마을 가까운 곳의 낮은 지능선이 쫓비산이다. 높이로 산을 평가할 수 없지만, 멀리서 귀한 시간을 내어 왔다면 산행의 즐거움이 더 큰 산을 찾기 마련이다.

잠깐 올려치자 기관총이 빗발치는 듯 칼바람 성성한 정상이다. 몇 년 만에 찾았더니, 계단이며 데크를 깔끔하게 만들어 놓았다. 고정로프를 붙잡고 스릴 넘치는 바위를 탈 생각에 설레던 마음이 실망할 사이도 없이 드러나는 압도적 경치. 비로소 드러나는 지리산 노고단의 어마어마한 산세, 홀로 흰 빛을 띤 저 정겨운 큰 덩치의 산. 유일하게 눈이 남아 있는 지리산을 눈으로 어루만지며, 그리움을 달랜다. 저 산줄기에서의 추억이 순식간에 흘러가고, 오만감정을 뒤로하고 남쪽 첩첩산중을 새롭게 담는다.

신선대 꼭대기로 이어진 계단길. 뒤로 백운산 정상이 호남정맥 최고봉다운 위세를 과시하고 있다.
계단으로 오른 탓에 바위 맛을 생략한 게 아쉬워, 연세산악회 2인방이 바위 위에서 자세를 잡는다. 옛날 산꾼 방식대로 스릴 반, 칼바람 감내하는 인고 반을 섞어 클래식하게 정상을 오른다.
정상 30m 아래의 너른 데크에서 배낭을 풀고 간식을 먹으며, 호남정맥 최고봉이 내어주는 깊은 맛의 경치를 천천히 음미한다. 한쪽에선 신선대가 손짓한다. 정상은 많이 봤으니 빨리 넘어오라고 얘기하는 것만 같다. 육산 능선에 툭 튀어나온 통바위라 사람을 잡아끄는 힘이 있다.
하늘에서 본 백운사 임도. 지루한 오르막이지만 백운사를 지나면서 시원한 경치가 간간이 드러난다.
오르내림 있는 산길을 지나 통바위 아래에 선다. 바위 벼랑으로 난 계단을 따라 오르자 신선이 즐겼을 법한 경치가 드러나는 마당바위다. 정상과는 조금 다른, 복잡하게 흘러내린 지능선이 세세히 드러나는 정교한 경치의 전망대다.
아쉽게도 둘러보아도 매화 닮은 화사한 빛깔은 없다. 매화는커녕 초록빛조차 보기 어려운 어두운 갈색 산줄기지만, 금방이라도 거대한 날갯짓을 보여 줄 것마냥 날개처럼 미묘한 곡선을 이루며 뻗었다. 이렇게 따사로운 햇살과 비가 세 번쯤 내리고 나면, 고집스런 상념 끝에서 꽃이 필 게다.
백운산 정상에 선 연세산악회 최동혁(왼쪽)·최수연씨.
퇴계 이황의 유언은 “저 매화에 물을 주라”는 것이었다. 퇴계의 매화 사랑은 유명해 평소 매화를 ‘매형梅兄’, ‘매군梅君’이라 부르며 ‘혹애酷愛(지독한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엄동설한에도 홀로 고상하게 피는 꽃을 보면 퇴계의 마음을 이해할 것도 같다. 한평생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매화의 품격을 사랑했던 것이다.
재잘거리는 유치원생들이 돋아나고, 깔깔거리는 중학생들이 잎을 뻗어내면, 다 아는 풍경을 생전 처음 보는 것처럼 산은 진심을 다해 키워 낼 터다. 그 기적 같은 흐름 속에 세상 고민 다 메고 왔던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위로 받고, 치유 받아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제 매화를 보러 갈 시간이다.
백운산 1,222m
광양시 옥룡면·다압면·진상면

산행 거리 10.5km
산행 시간 5시간
산행 난이도 중(어려운 곳 없지만 지구력 필요)
산행길잡이
백운사와 상백운암까지 임도가 나 있으나, 포장공사 중이다. 올해 연말까지 마무리할 계획이다. 공사 중인 비포장길이라 승용차로는 오르기 어렵다. 진틀마을을 기점으로 원점회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큰 산이라 어디를 기점으로 하든지 주능선까지 오르는 데 1시간 이상 걸린다. 정상 암릉 구간에는 계단이 있어 초보자도 어렵지 않다. 신선대 역시 계단이 있어 주의하면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신선대는 우회해서 뒤로 올랐다가 다시 되돌아와 진틀 방향으로 내려가면 된다.

특별히 어렵거나 위험한 곳은 없으나, 주능선까지 올랐다가 하산하는 거리가 짧지 않으므로 약간의 지구력을 요한다. 병암산장까지 도로가 나 있으나, 사유지라 주차를 금지하고 있다. 1km 아래에 너른 공용주차장과 화장실이 있다.

백운산 등산지도
교통
수도권에서는 KTX 열차로 순천역까지 이동해 차량을 이용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서울역에서 하루 5회(07:05, 09:48, 12:40, 16:38, 17:38) 운행하며 2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요금 4만4,300원. 순천역에서 광양시외버스터미널까지(11km) 택시로 이동해 하루 15회 운행하는 논실 방면 21-3번(05:30~20:10) 버스를 타고 진틀에서 하차해야 한다.

숙식(지역번호 061)
백운산 입구인 동곡리에는 닭구이와 백숙집이 많다. 캐빈하우스(762-7133), 황토가든(010-3074-2095), 병암산장(762-6781) 등이며 닭구이와 백숙 모두 한 마리에 5만 원 정도 받는다. 광양나들목 부근 광양불고기 전문점 금목서 광양불고기(0507-1316-3300), 삼대광양불고기(763-9250) 등이 있다. 중국음식 맛집으로 청해루(762-5088), 짬뽕매니아(0507-1306-6837) 등이 있다. 백운산 기슭의 대표적인 숙소는 광양시에서 운영하는 백운산자연휴양림(797-2655)이 있으나, 코로나로 임시휴장 중이다.

광양 매화마을
백운산 동북쪽 자락의 광양시 다압면은 ‘매화마을’로 유명하다. 보통 3월 중순이면 꽃망울을 터뜨린 매화를 즐길 수 있다. 매실농원 언덕에서 매화꽃 너머로 내려다보는 섬진강 풍경은 한 폭의 멋진 산수화가 된다. 매화마을의 청매실농원은 전국에서 가장 먼저 매화나무를 집단재배한 곳이다. 1930년경 심은 매화나무 수백 그루가 포함된 단지가 섬진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잘 가꾸어져 있다.

매년 매화마을에서 매화축제가 열렸으나 올해는 코로나 확산을 예방하기 위해 취소됐다.
※ '본 기사는 월간산 3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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