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어난 몸, 가쁜 호흡..현실 속 임신부를 찍다

김미향 2021. 3. 4.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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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현 사진전 '나는 낳기로 결정했다'
서울 광진구 갤러리 사진적 3일 오픈
정지현 작가 제공

창 밖을 내다보는 멍한 시선, 티브이를 보며 부른 배를 쓰다듬는 손, 냉담해보이는 남편의 발, 방 한 켠에 절묘하게 놓인 결혼사진, 날로 거대해지는 몸과 숨쉬기 힘든 걸음걸이, 무표정한 얼굴 뒤 메슥거리는 속….

10여년에 걸쳐 만삭 임신부 모습을 찍은 사진작가 정지현(47)씨의 사진전 ‘나는 낳기로 결정했다’가 3일 서울 광진구 갤러리 사진적에서 열렸다. 평범한 임신부의 가정에서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잡아낸 사진 11점은 정 작가가 2008년부터 2020년까지 촬영한 것들이다. 촬영 시점은 다양하지만 임신 여성에 대한 ‘사회적 강요’는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동일한 주제의식이 드러난다.

3일 낮 갤러리서 만난 정 작가는 “지인의 지인까지 임신한 분들을 찾아 2008년 첫 촬영을 했다. 사진의 주인공들은 모두 임신 8개월 이후 만삭인 분이었다. 몸도 너무 무겁고 힘들어하셨다”고 했다.

정 작가가 ‘집 안의 임신부’를 주제로 촬영하게 된 계기는 2000년대부터 유행한 임신부 만삭 사진 찍기 열풍이다. 정 작가는 “임신한 여성들이 스튜디오에서 아름답게 촬영하는 게 유행인데,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 꽃을 꽂는 등) 스튜디오 촬영 모습이 현실적이지 않았다. 나는 만삭 때 되게 힘들었는데 어떻게 저렇게 하지, 의문이 들었다”고 말했다.

2008년 첫 촬영에서 만난 여성은 임신 뒤 거의 집 밖에 나가지 못해 하루 빨리 외출을 하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이 여성의 임신 후 일상은 윗층에 사는 시어머니 끼니를 챙기는 것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방 한 켠에 태교동화를 둔 채 햇살 가득한 창 밖을 내다보며 배를 쓰다듬는 여성의 사진은 이렇게 탄생했다.

작품 중 티브이 홈쇼핑을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인물이 있는데, 이 여성은 결혼이주여성이다. 정 작가는 “한국에 와 말도 안 통하는데 결혼하고 아기를 가진 상황이었다. 홈쇼핑에선 갈치를 팔고 있는데 읽을 수 없는 상황을 촬영했다”고 전했다.

서울 광진구 갤러리 사진적에서 사진전 ‘나는 낳기로 결정했다’를 연 정지현 작가. 김미향 기자

전시 작품은 대부분 정 작가가 임신부를 찾아가 상황을 듣고 현실에 맞게 연출한 것이다. 예를 들면, 식탁에 앉은 남편을 싱크대 앞에서 바라보는 사진이 있다. 이 작품 주인공의 남편은 직장에서 영업일을 한다. 술을 마시고 자정이 되어서야 퇴근하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를 사진으로 표현하기 위해 정 작가는 남편이 퇴근한 밤 12시에 집을 방문해 이 장면을 촬영했다. 임신으로 몸이 힘든 아내, 정서적 지지자가 되어 주지 못하는 남편의 상황을 드러냈다.

사진 속 인물은 어떻게 발굴했을까. 두 아이를 출산한 경험이 있는 정 작가 경험담이 임신부들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정 작가가 어려웠던 섭외 과정을 설명했다.

“처음에 작업을 시작할 때는 유명 산부인과 홈페이지 게시판이나 맘카페에 글을 남겨 임신부를 만나보려 했는데 호응해주신 분이 없었다. 지인의 지인을 찾아 설득하고 찾아가 두세시간 함께 이야기 하자 집 안 풍경이나 얼굴을 사진에 담는 것에 호응해주셨다.”

당초 이 사진들은 2013년 ‘미영 현주 은정 그리고…’란 제목의 사진전으로 한 차례 세상에 공개됐다. 사진 속 여성들이 1970년대 후반에 태어난 점에 착안해 그 당시 가장 많이 지어진 여성 이름 3개를 따서 사진전을 연 것이다. 지난해 갤러리 사진적 안선영 관장이 이 사진들의 포트폴리오를 다시 본 뒤, 최근 작품을 더해 두번째 사진전을 열자고 제안했다. 사진전 제목 ‘나는 낳기로 결정했다’는 갤러리 운영자 황선미씨가 제안했다. 자녀를 출산하는 일이 비장한 결심을 동반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꼬집은 제목이다.

정 작가는 “나는 낳기로 결정했다는 말이 이 사회에 많은 메시지를 던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출생율이 바닥까지 떨어진 지금 막상 출산을 결정하기엔 태어난 아이들이 만나게 될 환경이 좋지 않다. 30대 중반인 지인은 출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지난 1월 서울시 임신출산정보센터에 게시된 ‘남편 및 가족 밑반찬 챙겨놓기’ ‘불안한 마음은 십자수로 달래라’ ‘출산 후 작은 옷을 걸어두고 체중관리 하라’ 등의 임신 말기 행동요령이 논란이 됐다. 정 작가는 “뉴스를 보면서 지금이 조선시대인가 어처구니가 없어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웃었다. 사회나 타인이 임신부에게 강요하는 것들을 이젠 하지 말자는 의도에서 이 촬영을 시작했다. 임신부라고 해서 사회의 강요에 따를 필요 없다. 나의 선택, 나의 몸이 가장 소중하다”고 말했다. 그는 “임신 중에 자꾸 클래식을 들으라고 하는데 난 내가 좋아하는 가수 이승환의 노래를 듣고 장국영의 뮤직비디오를 보는 게 훨씬 행복했다”고 했다.

“아이를 낳고 키워보니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가 행복하더라. 내가 우울해지면 너네 다 병들어, 제가 집에서 아이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다.” 정 작가가 환하게 웃었다. 전시는 28일까지 열린다. 매주

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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