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의 世說新語] [612] 무용순후 (務用淳厚)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2021. 3. 4.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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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5년 9월, 선조가 하교했다. “교격(矯激)한 사람을 쓰지 말고, 순후한 사람을 쓰기에 힘써야 할 것이다(勿用矯激者, 務用淳厚之人, 可也).” 교격은 스스로 바르다고 믿어 과격하게 밀어붙이는 태도다. 임금은 원리원칙을 따져 좌충우돌하는 과격한 사람 말고, 시키는 대로 말 잘 듣는 사람을 원했다.

김계휘(金繼輝)가 한마디 했다. “순후한 사람을 쓰고 과격한 사람을 배척하려 하는 것이 옳은 말이기는 하다. 다만 임금이 이러한 뜻에 지나치게 주안을 두면, 부드럽게 아첨하는 자가 순후하다는 이름을 얻고, 강직한 사람은 과격하다는 비방을 받게 되니, 그 해로움이 얕지 않다.” 교격을 배척하려다가 바른말 하는 신하를 잃고, 순후함을 조장하려다가 아첨하는 예스맨만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오면 어찌하느냐는 말이었다.

집의(執義) 신점(申點)이 북변의 장수를 길러 오랑캐 기병의 기습에 대비해야 한다고 건의하자, 임금이 불쑥 말했다. “조정에 큰소리치는 사람이 많으니, 오랑캐의 기병이 쳐들어오면 그들을 시켜 막게 하시오.” 말 속에 빈정대는 뜻이 있었다.

율곡이 바로 말했다. “전하께서 말씀하신 큰소리치는 자는 어떤 사람을 가리키시는 것입니까? 실속 없이 큰소리만 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반드시 일을 그르칠 것입니다. 어찌 적을 막게 한단 말입니까? 지금 유자(儒者)의 말은 털끝만큼도 쓰지 않으시면서, 큰소리라고 지목하시며 적을 막으라 하시니, 옳지 않습니다.” 임금이 대꾸하지 않자, 한 번 더 말했다. “전에는 임금께서 바른말을 즐겨 들으시고, 유신(儒臣)에게 뜻을 기울이셔서 온 나라가 기뻐했는데, 근래에는 마음이 갑자기 바뀌셔서 유신을 소외시키시니, 전하께서 무슨 연유로 이리하십니까?”

이듬해 2월, 율곡이 벼슬을 그만두고 떠나자, 임금이 말했다. “이 사람은 교격한 데다, 나를 섬기려 들지 않으니 내가 어찌 굳이 붙잡겠는가?” 앞서 말한 교격한 신하란 바로 율곡을 두고 한 말이었다. 바른말 하는 신하가 곁을 다 떠나고, 임금은 예스맨들로 일사불란한 진용을 만들더니, 끝내 방향을 잃고 다투다 임진왜란을 불렀다. 율곡의 ‘석담일기'에 전후 맥락이 자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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