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의진의 시골편지] 장수마을 소리꾼

임의진 목사·시인 2021. 3. 4.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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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남쪽 사람들은 개그 재능이 남다르다. <개그콘서트>가 문을 내린 이유가 정치인들 때문만일까. 백세 즈음 되시는 분들 뵈면 유머감각이 탁월하셔. 웃음은 장수 비결. 백세가 낼모레인 분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이 하나 있지. 다름 아니라 “백세까지 사십시오잉”. 당사자 목표를 물어보고 해야 할 소리겠다. “어떻게 이렇게 장수하신 건가요?” “안 죽응께 오래 살재. 말이라고 물어?” 첫 번째 깨갱하게 된다.

“오래 사시다보면 꼴보기 싫은 인간들도 참 많으셨을 텐데요.” “암 그랬재. 그라등가 말든가 냅 둬부렀재. 그라자 차차 한나둘씩 죽어불듬마. 막상 떼(잔디) 덮고 돌아누웠당께 웬수라도 짠하듬마.” 두번째 깨갱. 깊이 잠 못 이루는 걸 가리켜 노루잠, 토끼잠, 괭이잠, 벼룩잠 이렇게 부른다던데, 장수하시는 분들 보면 그야말로 꿀잠에다 단잠이다. 충분히 누워 잠을 즐기고, 먹는 것도 좀체 가리질 않아. 또 지지재재 말씀도 많은 수다쟁이들. 숲이 짙으면 범이 들 듯 음험하고 좀체 속을 알 수 없는 군상들은 목숨줄이 짧다. 같이해도 덕을 베풀 줄 모르면 주변에 속엣말 나눌 동무가 없는 법.

가난살이에도 웃음이 피어나는 건 한이고 슬픔을 이겨내서렷다. 이청준의 소설 <서편제>에 보면 “목청도 목청이지만, 좋은 소리를 가꾸자면 소리를 지니는 사람 가슴에다 말 못할 한을 심어 줘야 한다던가요?” 유장하게 강물이 흘러가듯이 한이고 슬픔이었던 마음도 봄눈 녹듯 녹아 흘러서 가고, 막힌 목청이 탁 트이게 되는 봄날이다. 아픈 실도랑들 모여 큰 강물에 닿게 되면 해학이 넘실대고, 웃음조차 헤퍼지는 것이렷다. 소리꾼들 재미난 이야기에 귀기울이고 싶어라. 지루한 반복과 하나 마나 한 말로 흐리멍덩한 세상. 앞질러 걸으면서 사슴처럼 노래하는 소리꾼은 어디 있느뇨, 구성진 남도소리, 북장단에 콸콸 쏟아내는 장수마을 소릿재 주막이 그리운 봄날이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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