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드물고 아름다운 / 손아람

한겨레 2021. 3. 3.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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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서울 종로구 관철동 젊음의 거리에서 지난 1일 오후 한 노점상이 비가 오는 가운데 영업을 준비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과 정부는 4차 재난지원금을 사업자등록을 전제로 노점상에게도 50만원씩 소득안정지원금을 지급할 계획이다. 연합뉴스.

손아람ㅣ작가

이재명표 기본소득을 두고 포퓰리즘, 조삼모사, 트로이의 목마라는 비판까지 등장했다. 불명확한 재원조달 계획 탓이다. 탄소세, 데이터세, 로봇세, 토지보유세 등을 걷겠다고 하지만 충분해 보이지 않는다. 탄소세 경우 역진성이 잘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대체에너지 활성화를 위한 과정이지 본격적인 세원이 되기 어렵다. 탄소세의 목적은 세금을 더 걷는 게 아니라 세원인 탄소제조업을 규제하는 것이다. 데이터, 로봇, 부동산은 한국의 주력산업이 아니다. 빠진 고리는 소득세다. 이 지사는 소득세를 직접 언급하는 대신 “다수의 국민이 세금보다 더 많이 받는 방식” 같은 모호한 표현을 사용하면서 조세부담자인 소수가 누가 될지를 다분히 의도적인 빈칸 속에 넣어두었다. 기본소득을 생애 안건으로 내건 이재명 경기지사가 소득세제 개편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이 시점에서 정치적 출혈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을 터다.

기본소득 논쟁은 결국 증세 논쟁이다. 부자 증세 없는 소득불평등 해소가 가능하냐는 의구심, 혹은 부자 증세가 현실적으로 가능하냐는 회의를 가진 이들이 논쟁의 한축을 담당하고 있다. 내가 아는 한 이 논쟁에 진짜 부자들은 아무도 참전하지 않았다. 기본소득 논쟁이 뜨겁게 달아오른 지난달, 갑부들의 소식은 논쟁이 허용될 수 없는 압도적인 미담으로 들려왔다. 김범수 카카오 의장과 김봉진 배달의민족 창업자가 재산 절반 이상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약속을 공표한 것이다.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걷자’는 말을 대권주자조차 입에 담기 부담스러워하는 사회와, 그런 사회에 재산의 절반을 환원하겠다는 갑부들은 어떻게 양립하는 걸까?

기부와 납세의 기싸움은 사실 역사가 꽤 길다. 세계 최대 자선단체인 록펠러 재단이 설립된 1913년은 미국에 현대적 누진소득세가 도입된 해이기도 하다. 스스로 설립한 재단에 기부하는 방식으로 소득세액을 크게 줄인 록펠러는 몇년 뒤 상속세가 발효되기 전에 회사 지분을 아들에게 증여함으로써 조세회피의 선구자라는 오명을 썼다. 공교롭게도 가문의 3대 상속인 데이비드 록펠러는 배달의민족 창업자 김봉진씨가 이번 기부 서약으로 가입한 억만장자 기부클럽 ‘기빙플레지’의 원년 멤버이기도 하다. 기빙플레지의 설립을 주도한 빌 게이츠는 재산 거의 전부를 기부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스스로 최대 주주였던 마이크로소프트의 조세회피를 두고서는 ‘나는 돈을 내놓더라도 주주들의 돈을 세금으로 쓸 수는 없다’는 기이한 논리를 펼친 적이 있다.

부자들이 단지 조세회피 목적으로 기부한다는 비판은 공정하지 않다. 부자들의 기부금은 원래 냈어야 할 세금보다 더 큰 규모이며, 이 돈은 실제로 좋은 일에 쓰이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어차피 사회에 돌려주려는 돈을 처음부터 더 많은 세금으로 내는 데는 왜 소극적인 걸까? <한겨레> 안영춘 논설위원은 지난 칼럼에서 이들을 가리켜 배달의민족 운영사 이름인 ‘우아한 형제들’처럼 자기 삶에 대한 심미적 주체라고 표현했다. 그렇다면 이들은 세금을 아까워하는 게 아니라, 납세자로 국가에 동원되었을 때 잃게 될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자기 힘으로 세상을 바꿀 ‘아름다운’ 기회 같은 것.

심미성이 나쁜 건 아니므로 기부자 개인의 선의를 의심할 필요는 없겠지만, 기부가 왜 심미적인지를 생각해볼 수는 있다. 아름다운 것은 드물다. 드물기 때문에 아름답다. 기빙플레지의 비공식적 가입조건인 ‘재산 절반 이상의 기부’가 심미성의 기준이라면 ‘10억 달러 이상의 재산 보유’는 희소성을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 이런 일은 너무 드물어서 뉴스거리는 될 수 있겠지만 보편적인 사건일 수가 없다. 그래서 심미적인 것은 때로 사회적인 것과 충돌한다. 사회적인 것은 반드시 일상적이고 보편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심미적인 경험이 사회적인 경험을 압도할 때 현실은 비현실적인 미담에 자리를 내준다. 세금보다 차라리 더 큰 액수의 기부를 선호하는 갑부의 딜레마는 다양한 버전으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가난한 학생에게 공짜 치킨을 대접한 자영업자를 ‘돈쭐’내주면서 재난지원금 대상에 노점상이 포함된 사실에 분개하는 시민. 사회 환원을 약속한 배달앱 창업자를 칭송하면서 집단쟁의에 돌입한 또다른 배달앱의 노동자들을 적대하는 소비자. 낭만 없이 건조한 보편적 사회 정의는 이들에게 매력이 없다. 거기에는 ‘우아한 초인’의 서사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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