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경의 '시코쿠 순례'] (5) 왜 오셋타이(보시)를 하는가" 마음속의 부처를 찾아 나선 길이 '순례'

2021. 3. 3.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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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치현 사찰들은 거의 해안선을 따라 있어 버스를 타든 기차를 타든 태평양의 풍광을 감상할 수 있다. 기차를 놓친 덕분에 버스와 택시를 이용해 24번 호쓰미사키지(最御崎寺)를 들렀고, 그날 목표한 사찰의 납경을 받기 위해 서둘렀다. 그러다 보니 헨로상(순례자)을 거의 만날 수가 없었다.

26번 곤고초지(金剛頂寺)에서 27번 고노미네지(神峰寺)까지는 도보로 12시간 걸리는 거리여서 걷기를 아예 포기하고 26번 참배를 마치자마자 기차역으로 갔다. 작은 간이역이라 과연 기차가 서는지 의심이 들었다. 벤치에 초로의 남자가 앉아 빵을 먹고 있었는데, 하쿠이는 입지 않았지만 옆에 놓인 지팡이를 보고 헨로상임을 알았다. 기차가 제시간에 올지 걱정이 된다고 말을 걸었더니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했다. 같이 기차를 타고 27번 사찰까지 함께 걷다 보니 또 어쩌다 동행이 됐다. 가마쿠라에서 온 코이즈미 코보상이었다. 그날 코이즈미상 덕분에 29번 고쿠분지(國分寺)까지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코이즈미상은 나의 세 번째 동행이었고 헨로미치(순례길)에서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했던, 가장 인연이 많았던 동행이었다.

순례를 시작한 지 열흘째 되고 보니 혼자보다는 길동무가 있으면 한결 수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31번 치쿠린지(竹林寺)를 마치고 나오다 32번 젠지부지(禪師峰寺) 이정표를 살피고 있는 남자를 발견하고 용감하게 말을 걸었고 뻔뻔스럽게 동행을 청했다. 연애하자고 덤비는 것도 아니고 잠시 같이 걷자는 건데 뻔뻔하지 못할 이유도, 용감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31번 치쿠린지. 문수보살이 안치된 본당은 일본 중요문화재다.
시코쿠 가가와현이 고향인 42살 오니시상은 스트레스에 견디다 못해 직장을 그만두고 순례에 나섰다고 했다. 처음에는 내가 오니시상 뒤에서 걸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오니시상을 앞질러 가고 있었다. 나와의 동행이 거북해 일부러 천천히 걷나 마음이 쓰이기 시작할 무렵, 순례자를 위한 휴게소가 나오자 오니시상이 잠깐 쉬어 가자고 했다. 길을 다시 떠날 때까지 한 5분여를 쉬는 동안 오니시상은 말을 하기보다는 담배를 더 많이 피웠다. 그래도 내가 묻는 말에는 성의 있게 대답해줬다. 시코쿠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순례는 처음이라고 했다.

오니시상은 온전한 아루키 헨로상(도보 순례자)이었다. 31번까지 줄곧 걷느라 무릎에 무리가 왔다고 했다. 시간이 갈수록 나보다 뒤처진 이유가 거기 있었다. 다시 걷기 시작한 지 얼마 못 가 오니시상은 표 나게 절뚝이기 시작했다. 나는 몇 번이나 괜찮냐 물었고 그는 그때마다 괜찮다며 오늘의 목적지인 33번 셋케이지(雪蹊寺)까지 간 다음 하루쯤 쉬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때부터 오니시상과 나는 오래전부터 그래온 듯, 내가 앞서 걷다 헨로미치 표시를 찾지 못해 멈춰서 두리번거리면 뒤따라온 오니시상은 열심히 헨로미치 표시를 찾거나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물어서까지 성실하게 길 안내를 했다.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은 오로지 걷는 것에만 열중했고 가끔씩 그늘진 곳이 나오면 약속이나 한 듯 쉬었다. 31번 치쿠린지에서 32번 젠지부지까지는 약 8㎞였다.

젠지부지에 도착한 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생각났던 사람을 위해 촛불을 켜고 기도를 했다. 오니시상도 불경을 펼쳐 들고 열심히 기도했다. 납경을 받고 나오자 쉬고 있던 오니시상이 과자와 녹차를 줬다. 32번 사찰에서 순례자에게 제공하는 오셋타이라고 했다.

32번 사찰에서 33번 셋케이지까지도 8㎞ 정도인데 이미 8㎞를 걸은 터라 자신감이 붙었다. 오니시상과 내가 또 앞서거니 뒤서거니 적당히 간격을 두고 33번을 향해 얼마쯤 걷고 있는데, 한적하게 길게 이어진 개천길이 나왔다. 차도 쪽보다는 그 길이 좋아 보여 바쁘게 건너가는데 “헨로상” 하고 부르는 걸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개천 옆 벤치에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가 손짓을 하고 있었다. “곤니치와” 응답하니 잠시 쉬어 가라고 했다.

순례길에서 만난 오니시상과 이마이상(좌). 이마이상이 ‘오셋타이’를 위해 간이 카페처럼 만든 밴(우).
▶“이곳에 앉아 많은 사람을 만나 인생을 배운다”

오니시상과 내가 다가가자 할아버지는 커피가 좋은지 차가 좋은지 물었다. 할아버지 옆에는 미니밴이 세워져 있었고 짐칸 문이 열린 차 안에는 버너와 주전자 종이컵, 커피와 녹차가 준비돼 간이 카페 같았다. 나는 차를 부탁하고 오니시상은 커피를 부탁했다. 버너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할아버지는 내가 ‘3111번째’라고 했다. 무슨 의미인가 궁금했는데 할아버지가 명함을 건네며 설명을 해줬다. 이마이 노부가츠상은 올해 83세인데 14년 전 일을 그만둔 뒤부터 매일 오전 이곳에 나와 33번으로 가는 헨로상에게 차를 오셋타이(보시)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나는 3111번째로 이마이상의 오셋타이를 받은 헨로상이라는 의미다.

오니시상이 “왜 오셋타이를 시작하게 됐냐”고 묻자 이마이상은 “이곳에 앉아 많은 사람을 만나 인생을 배운다”고 했다. “순례를 하는 이유는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지만 결국 모두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부처를 찾아서 가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 부처를 찾아가는 헨로상을 응원해주면서 보람을 느낀다고. 부처는 우리 마음속에 살고 있는데 단 한 번의 순례로 발견하는 사람도 있고 수십 번 순례를 해도 끝끝내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다. 불경 해석과 함께 더 깊이 있는 설명이 이어졌지만 내 일본어는 거기까지. 일순간 미소 짓는 이마이상이 살아 있는 부처처럼 보였다.

커피와 차를 달게 마시는 동안 무거워진 다리도 좀 가벼워진 듯싶었다. 연신 머리를 숙여 감사 인사를 하고 33번을 향해 가는데 뭔가 찜찜했다. 33번 셋케이지로 가는 바지선 선착장에서 많은 헨로상을 만났다. 캐나다에서 온 다니엘이라는 중년 여성은 그들에게는 이색적인 불교 사찰 순례를 즐기고 있었다. 오니시상의 불편한 다리를 보고 다니엘 일행이 테이핑하는 법을 전수해줬다. 나도 옆에서 눈으로 배운 그 테이핑 법으로 순례 내내 효과를 봤다. 그렇게 오니시상과는 셋케이지 참배를 마치고 작별을 고했다. 그날의 숙소였던 사카모토 민박은 친근한 가정집이었고 세탁 서비스까지 해줬다. 잠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려다 그날 내내 이마이상의 얘기와 차 한잔의 친절이 준 여운이 길어질수록 찜찜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나도 모르게 순례를 하면서 누군가로부터 접대를 받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었다. 이마이상에게 대접받은 접대에 대해 나도 성심성의껏 찻값을 오셋타이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이마이상은 더 많은 헨로상을 응원할 수 있었을 텐데.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마음에 걸린다.

오늘도 이마이상은 그곳에 차를 대 놓고 앉아 거기까지 걸어오느라 다리가 무거워진 헨로상에게 기운을 북돋아줄 차 한잔을 권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마이상 나이를 생각하면 장담할 수 없지만, 건강한 모습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면 좋겠다.

[최현경 한국방송작가협회 부이사장]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98호 (2021.03.03~2021.03.09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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