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욱의 지식카페>직책상 어쩔 수 없었다?.. 옳지못한 선택을 복종으로 속이는 자기기만

기자 2021. 3. 3.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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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 서동욱의 세계의 산책자 - (17) 자기기만

외면도 결국 능동적 자기결단… 현실세계에서 불의가 정의를 이기는 경우가 많은 이유

타인 지키지 않은 카인은 자기기만의 화신… 카인을 알았던 인류는 ‘그 비열한 의식’ 치료할 수 있어

“내가 그처럼 나 자신을 속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자 나는 소름이 오싹 끼쳤지. 그래, 그 여자한테 손을 대지는 않았지. 하지만 나는 그 여자가 나를 만지도록 일을 꾸몄어. 그리고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엔 그게 더 나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저 말 속에서 적어도 우리가 알게 된 건 자신을 속이는 일, 자기기만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을 속일 수 있다면, 또는 내가 나에게 속아 넘어간다면, 그리하여 나의 한평생이란 전과자가 별을 달듯 자신이 만든 거짓의 감옥을 계속 들랑거리는 일이라면, 삶이란 얼마나 무서운가.

처음에 읽은 문장은 미국 작가 폴 오스터의 ‘거대한 괴물’(황보석 역)에 나오는 구절이다. 사연은 이렇다. 미국의 독립기념일을 맞은 파티에서 주인공은 호감을 가진 한 여성과 마주한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그에게는 그녀에게 손을 대고 싶다는 욕망이 생긴다. “나 자신에게 마리아 터너의 다리를 만지고 싶다는 고백을 하기가 너무 부끄러워서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했던 셈이지. 그 정도로까지 자신을 기만했다면 무슨 일을 당해도 싼 거고.” 주인공은 그녀의 몸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존중하면서도 그녀와 접촉할 수 있도록 자신을 속인다. 때마침 밖에는 독립기념일의 불꽃놀이가 시작됐다. 그는 불꽃놀이를 더 잘 보려고 창밖으로 나가 건물 외벽의 비상계단에 위태롭게 섰다. 깜짝 놀란 여자는 그가 떨어질까 봐 뒤에서 끌어안는다. 소원대로 신체적 접촉이 이뤄진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자신에게 이렇게 변명하리라. ‘내가 원한 게 아니야. 난 불꽃놀이를 보고 싶었을 뿐인데, 여자가 와서 끌어안았을 뿐이야.’ 남자는 욕망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욕망을 충족한 기만을 저지른 것이다. 남자가 원했던 신체 접촉은 이제 남자의 책임이 아닌 우연한 일로 둔갑한다. 책임지지 않는 것,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는 것, 이것이 자기기만이다.

우리는 토마스 만의 소설 ‘요셉과 그 형제들’(장지연 역)에서도 자기기만의 흥미로운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이집트로 팔려간 요셉은 이집트 장군의 하인이 되고, 장군의 아내가 요셉에게 사랑의 감정을 가지게 됐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요셉을 질투한 다른 이집트 하인들이 요셉이 집안에서 불미스러운 일을 저지른다고 장군의 아내에게 거짓말을 한다. 이제 그녀는 집안의 재산을 지키는 여주인으로서 자신이 사랑하는 요셉을 수시로 감시하고 추궁한다.

그러나 그녀가 한 일이 요셉을 감시하는 일만이었을까? “사랑하는 자의 말이 담고 있는 내용이 무엇이면 어떠랴. 어떤 대화든 사랑의 대화가 되는 것이다.” 힐난과 감시의 말이더라도, 사랑하는 자와 나눈다면 그것은 감미로운 사랑의 대화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주인은, 사랑의 대화 같은 것은 생각해 본 적도 없으며 오로지 여주인으로서 하인을 감시하는 의무만을 다할 뿐이라고 자신에게 변명한다. “집안의 불미스러운 일이 이처럼 심각하니 자신이 이를 막는데 참여함으로써 얻게 되는 즐거움은 ― 그녀는 이것을 근심과 열성이라 불렀다 ― 정당한 것이라 여겼다. 인간이 어느 정도까지 자신을 속일 수 있는지, 사뭇 놀랍다.” 요셉을 감시하는 중에 자신에게 찾아온 쾌락은, 언제 불어올지 모르는 바람이나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처럼 자신이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우연한 것이 돼 버린다. 쾌락을 즐기면서도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나와 무관한 일이라고 변명하는 것, 이것이 여주인의 자기기만이다.

더욱 흥미로운 자기기만의 한 모습을 우리는 유럽 최대 연애 사건의 주인공인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중세의 대표적인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아벨라르는 동료 성직자의 조카딸인 엘로이즈의 가정교사가 된다. 둘의 관계는 이내 사제 관계에서 연인 관계로 발전한다. 비밀이 될 수 없었던 이 연애는 아벨라르가 거세당하고, 엘로이즈가 수녀원에 들어감으로써 막을 내린다. 엘로이즈와의 사랑을 고백한 편지에서 아벨라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는데, 겉으로 사제 관계였던 이들이 어떻게 사랑놀이를 했는지 잘 알려준다. “교육이란 구실 하에 우리는 완전히 사랑에 몰두했던 것이네. … 때로 나는 매질을 가하기까지 하였다네. 그것은 분노의 매질이 아닌 사랑의 매질이었으며, 미움의 매질이 아닌 애정의 매질이었던 것이네. 그리고 이 매질은 온갖 향료보다도 더 감미롭기만 하였던 것이네. … 여간해서는 그 일에 진력나지 아니하였던 것이네.”(정봉구 역) 때리고, 거기서 향료보다 더 감미로운 쾌락을 얻고…. 아벨라르는 꼭 사드 후작 같지 않은가! 체벌하는 아벨라르는 선생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그것은 그저 아벨라르 본인도 모르게 뒷문으로 사랑의 쾌락이 들어오도록 하는 기만적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쾌락은 마치 선생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동안 우연히 줍게 된 금화 한 닢처럼 취급된다.

이런 식으로 ‘나는 어쩔 수 없었어’ ‘이 사태에 대해 나는 책임이 없어’라고 핑계 대는 것이 자기기만이다. 이것이 기만인 까닭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선택에서 기인하는 것임에도, 자신은 그에 대해 수동적이다고 스스로에게 거짓 변명하기 때문이다.

나는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는 저 기만의 바탕에는 사실 ‘자발적인 선택’이 자리 잡고 있다. 장 폴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재미있는 예를 소개하고 있다. 한 여인이 있다. 그녀는 누군가 전화를 걸어 그녀에게 명령을 내린다고 호소한다. ‘그는 자기가 하느님이래요!’ 그녀는 하느님의 전화를 받고 하느님의 명령을 어쩔 수 없이 따르고 있는 중이다. 누가 신의 명령을 거역하겠는가? 그녀가 신의 명령에 따라 설령 살인했다 한들, 누구도 그녀를 비난할 수 없으리라. 신 앞에서 감히 그녀는 어쩔 수가 없었을 테니까. 과연 그럴까?

그녀는 이런 의구심을 가질 수 있으리라. 전화를 걸어온 자는 정말 하느님일까? 혹시 장난 전화였다면? 아니, 정말로 내가 전화를 받기나 한 걸까? 하느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의혹에 대해 대답해줄 수 있는 자는 오직 한 사람, 그녀 자신이다. 그녀만이 자신이 받은 전화가 하느님을 사칭한 장난 전화라고, 또는 정말 하느님의 명령이라고 ‘결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녀는 하느님의 명령을 어쩔 수 없이 따라야만 하는 자가 아니다. 그 이전에 그녀는 스스로 하느님의 명령을 받은 자가 되기로 ‘능동적으로’ 결단을 내린 자이다. 이런 결단이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어쩔 수 없이 하느님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수동적 상황만이 있었던 것처럼 변명한다는 점에서 그녀의 의식은 자기기만적이다. 토마스 만의 소설 ‘파우스트 박사’에서 니체와 같은 정신질환이 있는 주인공 레버퀸은 하느님을 만난 저 여인과 유사하게(또는 반대로) ‘악마’와 대면한다. 그는 저 여인처럼 초현실적인 존재에게 현혹되면서도 그의 정체를 이렇게 간파한다. “당신은 순전히 내 안에 들어 있고 나한테서 나온 것들만 말하고 있고, 당신 자신한테서 우러나온 것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소.”(김철자 역) 신 또는 악마의 명령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신과 악마를 이용해 나 자신을 속일 뿐이다. 모든 것은 나의 의식의 결단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사회를 절망에 빠트리는, 불의가 정의를 이기는 많은 상황은 바로 이런 자기기만에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우리는 직장에서, 이런저런 크고 작은 공동체에서, 정치의 영역에서 불의를 목격하고 또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는 음모(陰謀)를 목격하기도 한다. 이런 일들이 명백히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양심이 자신에게 알려줄 때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가? 정의에 헌신하는가?

슬프게도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불의 앞에서 자기기만적 정신은, 나는 이 공동체 안에서 별달리 힘이 없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한다. 더 나쁘게는, 내 직책상 그것은 내 일이 아니라서 ‘모르겠는데요’라고 답하며, 다른 사람들이 처리할 문제라고 외면한다. 능동적으로 판단하고 자발적으로 결단을 내리는 나 자신의 상위 심급에 나의 보잘것없는 직책을 놓아두고서 그 직책에 어쩔 수 없이 복종할 뿐이라고 변명하며, 정의의 요구를 외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나는 내 직책상 어쩔 수 없는 자가 아니라, ‘직책의 핑계를 대며 어쩔 수 없는 자가 되기로 능동적으로 자신을 선택한 자’인 것이다. 마치 그것이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던 것처럼 믿으려 한다는 점에서 그의 영혼은 자기기만적이다.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난처하고 귀찮은 정의의 요구를 피하기 위해서 자기기만이라는 달콤한 이불 속으로 피신했던 것 같다.

신화에 나오는 최초의 인간 가운데 한 명은 이런 유명한 변명을 만들어냈다. “내가 내 형제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타인을 지키는 일은 내 직무가 아니라서 나는 당신이 들고 온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으며, 다른 곳에 가서 물어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인류에 대한 책임을 지는 데 직책이 필요한가? 직무에 따라서만 타인을 지키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직무에 따라서만 정의에 헌신하는 자가 어디 있는가? 정의에 대한 헌신은 내가 자리한 어떤 사회적 직책에 의해서도 제한받지 않는다.

카인은 타인을 지키는 자가 되지 않기로 결단했듯, 반대로 타인을 지키는 자가 되기로 결단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처럼 처신하는 이상 그는 자기기만적 의식의 화신이다.

인류가 이런 카인을 알고 있었다는 것은, 자기기만이라는 의식의 비열한 환부를 인간의 근본에서 발견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자신이 찾아낸 그 환부를 죽음에 이르도록 방치하지 않고, 치료할 수도 있으리라.

서강대 철학과 교수

■ 용어 설명

자기기만 : ‘자기기만’을 장 폴 사르트르 같은 철학자는 ‘모베 푸아(mauvais foi)’라는 말로 칭하기도 했다. 이 표현의 문자 그대로 뜻은 ‘(자기에 대한) 잘못된 믿음’이다. 즉 스스로에 대해 그릇되게 믿는 것 또는 그릇되게 판단하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내가 뭔가를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그런 능력이 없다고 나 자신과 사람들에게 ‘변명’하는 것이 ‘자기에 대한 잘못된 믿음’, 자기기만이다.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결단하고 책임져야 하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이런 자기기만의 가면 뒤로 숨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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