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미얀마의 비극 [오늘을 생각한다]

입력 2021. 3. 3.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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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주말마다 “미얀마 군사 쿠데타 반대한다”, “미얀마 국민과 함께해주세요”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말없이 서 있는 청년의 이름은 조우다. 그는 2019년 9월 한국에 와 안산의 작은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조우의 고향 만달레이는 1885년까지 콘바웅 왕국 수도였다. 인도를 식민지 삼은 대영제국은 동쪽으로 손을 뻗어 이 불교 왕국을 침략했다.

영국은 적은 수로 많은 사람을 통치하기 위해 ‘분할통치’ 방법을 구사했다. 카렌족을 부추겨 갈등을 조장하고, 강제노동을 자행했다. 더구나 미얀마는 대영제국의 거대한 식량창고 구실을 떠맡아야 했다. 영국은 인도로부터 대량의 노동력을 끌어왔고, 이 때문에 미얀마 농민들은 수십년간 떠돌아다녀야 했다. 이 시기 끌려온 무슬림 집단이 바로 오늘날 로힝야 문제의 기원이다.

아웅산 수치의 부친 아웅산 장군은 미얀마의 ‘국부’다. 1940년 그는 중국공산당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 샤먼에 들렀다가 일본군에 붙잡혔다. 수년간 하이난섬에서 일본의 군사훈련을 받아 미얀마 독립군을 양성한다. 2년 후 미얀마를 독립시키지만, 태생적으로 괴뢰국가의 성격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종전 직전 연합군편으로 돌아서 책임을 피했지만, 위험한 도박은 지속됐다. 불안정한 내정은 강한 군대를 유지케 했고, 이는 상시적 쿠데타의 역사적 뿌리가 됐다.

일각에선 과거 네윈 군사정부가 ‘사회주의’와 ‘민족자주’를 표방했다면서 엉뚱하게 감정이입하기도 한다. 그들은 쿠데타는 악이고, 아웅산 수치는 선이라는 식으로 인식하는 것은 잘못됐다며 미국의 음모를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중국공산당도 인정하지 않는 조야한 시각이다. 과거 미얀마의 군부정권은 겉으로만 ‘사회주의’를 외쳤을 뿐, 그와 유사한 정책은 거의 펴지 않았다. 네윈은 모든 것을 버마족 중심으로 회복시키겠다며 민간정부 시절의 연방제를 폐지했다. 소수민족과 미얀마공산당은 군부정권의 억압 대상이 됐고, 민주주의는 짓밟혔다. 버마족 출신만이 사회를 통치하는 구도로 바뀌었고, 불평등은 조금도 해소되지 않았다. 영국이 취한 ‘분할통치’ 전략을 차용한 셈이다.

그러니 이번 군부 쿠데타에 대해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역사적 모순을 제대로 대면하는 태도가 아니다. 오늘날 미얀마가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역사적 모순을 극복하고 내부적으로는 민주주의를, 바깥으로는 첨예한 미중 대결에 끼인 위기를 극복하려면, 정치·경제적으로 미얀마 사회를 틀어쥐고 있는 군부 권력의 힘에 기대지 않아야 한다. 그러려면 ‘버마족 중심주의’를 배격하고, ‘팡롱협정’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8개 소수민족 간 평화와 자치를 존중하고 민주주의를 존속하기 위해 맺어진 이 약속은 미얀마 연방의 정신적 토대다. 미얀마 인구 3분의 1을 차지하는 소수민족은 이 정신이 다시 계승되길 열망하며, 군부 쿠데타에 맞서 함께 싸우고 있다. 지난 2월 22일에는 전국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와 연대하지 못한다면 대체 무엇과 연대해야 한단 말인가?

홍명교 동아시아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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