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은 어떻게 세계적 작가가 됐나

조상인 기자 ccsi@sedaily.com 2021. 3. 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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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미술관 회고전 '이불-시작'
2일 서소문본관서 개막해 5월16일까지
초창기부터 10년간 펼친 퍼포먼스 등
작품과 자료 120여점 전시
1988년작 '무제(갈망 레드)'(앞쪽)와 '몬스터:핑크' 등 이불의 소프트조각 설치 장면. /조상인기자
[서울경제]

성한 몸이 없다. 잘린 팔다리가 엉뚱한 데 붙었는가 하면 퉁퉁 부어오른 몸뚱이가 힘겹게 매달렸다.

1982년 홍익대 조소과에 입학한 그는 고민이 많았다. 또래가 당연히 느끼는 막막함과는 달랐다. 경제는 급성장하나 이제 막 민주화의 기미가 보이던 정치적 지체의 시대, 범람하는 대중문화와 국제화의 파고 속에 두려움과 희망이 교차하던 때, 젊은 여성 예술가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에 관한 근원적 고민이었다. 한지와 천, 나무와 금속 조각 등으로 실험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소프트(Soft) 조각’이다. 전통적 조각 재료와 대척점에 놓인 그의 작품은 살처럼 부드러운 촉감을 가졌으나 형태는 기괴했다. 심지어 작가가 소프트 조각을 ‘입고’ 전시장에 출몰하자 관람객들은 당황했고, 놀라움 만큼 더 유심히 들여다보게 됐다. 작가 이불(57)의 시작이다.

서울시립미술관이 세계적 작가로 성장한 이불의 초기 활동 시기인 1987년부터 10년 간의 활동을 집중 조명하는 회고전 ‘이불 시작’을 2일 서소문본관 1층에서 개막했다. 기존의 조각 전통을 탈피하고 인체를 재현하는 방식을 실험하던 대학생 시절의 작품부터 관련 기록 70여 점과 미공개 드로잉 50여 점 등이 선보였다. 이불이 어떻게 세계적 명성의 작가가 됐는지 더듬어볼 수 있는 기회다.

이불이 미술대학 재학시절 및 등단 초창기에 제작한 작품 드로잉과 자료사진들. /조상인기자

이름부터 범상치 않게 태어난 이불은 미술대학에서도 남달랐다. 민주주의의 빛와 그림자를 목격했고, 예술교육 시스템에 구조적 답답함을 느꼈으며, 여성을 보는 시선과 여성을 재현하는 방식에 분노했다. 1전시실에서는 대학 시절의 치열한 고민과 실험을 사진 자료로 만날 수 있다. 유명한 ‘소프트 조각’의 대표작인 ’무제(갈망 레드)’와 ‘몬스터:핑크’가 어둑한 전시장에서 빛난다. 여러 개의 잘린 손이 핏빛 몸뚱이에 뒤엉켜 붙은 형태가 메두사처럼 기괴해 보이다가도 천수관음처럼 영험한 기운을 내뿜는다. 1998년 발표한 ‘몬스터:핑크’는 인간을 초월한 새로운 생명체를 상상하게 한다.

이불의 1990년 퍼포먼스 '수난유감-내가 이 세상에 소풍 나온 강아지 새끼인 줄 아느냐?' /사진제공=서울시립미술관

2전시실은 12개의 대형 스크린에서 각기 다른 영상이 돌아가는 거대한 블랙박스다. 1988~1996년에 작가가 기획한 총 33회의 퍼포먼스 중 엄선한 12개의 기록 영상이다. 벌거벗은 작가가 등산용 밧줄에 허리를 묶인 채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신음하는 1989년작 ‘낙태’는 보는 이에게 고통이 전이된다. 제1회 한일 행위예술제 참여를 계기로 동숭아트센터에서 초연한 이 퍼포먼스는 지금의 관점에서도 ‘문제작’이라 불릴 만하다. 작가는 자전적 경험이었던 고난을 소리 내 고백하면서 자신의 몸을 학대해 매달았고 결국 이 행위는 관객들의 요청에 의해 중단됐다. 이듬해 ‘제2회 일·한 행위예술제’에 초청된 이불은 거대한 문어 형태의 외계 생명체 같은 ‘소프트 조각’을 입고 나리타공항에 나타나 그 차림으로 메이지신궁과 하라주쿠, 아사쿠사, 시부야 등지를 12일 간 돌아다녔다. 퍼포먼스의 제목은 ‘수난유감-내가 이 세상에 소풍 나온 강아지 새끼인 줄 아느냐?’. 마지막 날 도키와자 극장에 도착한 그는 2시간 동안 ‘낙태’ 퍼포먼스를 재연했다.

이불 '장엄한 광채'. 반짝이와 보석 등으로 장식한 날생선 설치작품으로 1997년 모마에서 전시했을 당시 악취로 철거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사진제공=서울시립미술관

전시를 준비한 권진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일련의 퍼포먼스에서 이불은 우화나 신화에서 그려진 여성의 이미지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상실에 대한 애도와 내면화를 보여준다”고 소개했다. 여성 비하 단어를 제시하고 그에 맞춰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보여주는 ‘도표를 그리다’나 옷이 사람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는 점에 착안해 관람객과 바지를 바꿔 입는 퍼포먼스를 벌인 ‘웃음’ 등은 헛웃음을 자아낸다.

미공개 자료들을 모은 3전시실은 생각지도 못한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다. 1990년 경기도 원당의 작업실이 홍수로 소실돼 준비 중이던 작품과 자료를 모두 잃어버린 긴박한 상황에서 이불은 사진으로 그 순간을 남겼다. 모든 것을 잃었다 싶은 상황을 새옹지마로 삼은 이때부터 작품 크기나 재질 등에서 현실적·물리적 한계를 떨치게 됐다.

작가 이불 /사진제공=서울시립미술관

1997년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초청돼 날생선 63마리를 전시했다가 악취로 철거된 작품 ‘장엄한 광채’의 흔적, 낙태 퍼포먼스 때 안고 있었고 이불의 작품 중 인간 형체를 온전히 유지한 유일한 작품인 태아 형상의 ‘무제’ 등도 볼 수 있다. 자신의 손을 그대로 본 떠 만든 작품 ‘알리바이’의 손등에는 나비가 박제돼 있다. 푸치니 오페라 ‘나비부인’을 연상시키는 나비는 동양 여성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의 상징이다. 하지만 작가는 나비 말고 손에 주목하게 한다. 권 학예사는 “정체성에 대한 작가의 치열한 고민과 주체 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면서 “자기만의 언어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한 과정이 작가 이불의 본질을 엿보게 한다”고 말했다. 전시는 5월16일까지.

/조상인 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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