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월회의 행로난]'구미호는 소를 먹는다'
[경향신문]
“소 먹자!” 십년 전쯤 방영된 드라마에서 여인으로 둔갑한 구미호가 인간 남친에게 한 말이다. 강산이 변할 만큼 세월이 흘렀건만 이 말을 접했을 때의 신선함은 여전하다.
무언가 새로운 인식 지평이 열리는 듯싶었다. 곰곰이 더듬어 보니 “닭 먹자” 정도의 표현은 간간이 썼던 듯했다. 하지만 농담으로라도 “소 먹자”고 한 적은 확실히 없었다. 사실 “닭 먹자”는 말도 많이 어색하다. ‘켄터키 닭’이니 ‘닭맥’ 하면 몹시 이상하지 않은가!
어쩌면 일상을 함께하던, 하여 때로는 가족 같은 정마저 들었던 소에 대한 우리 인간들의 자기 기만책일지도 모른다. “소는 소이고, 우리가 먹는 것은 어디까지나 고기일 따름”이라며, 소와 그것의 고기를 구분함으로써 죄책감을 줄이려는 심리적 기제 말이다. 소는 먹거리이기에 앞서 넉넉하지 못했던 삶을 함께 지탱해주던 반려자였다. 그러한 소를 먹는다고 표현하니 못내 미안했음이다. 소뿐 아니라 다른 가축도 마찬가지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사정일 뿐, 여우에게 소는 그저 실한 먹이일 따름이다. 만약 여우가 “소고기 먹자”라고 한다면 역으로 엄청 소름 끼치는 일일 듯싶다. 여우도 우리네 사람처럼 소를 먹거리용뿐 아니라 다른 용도로도 활용한다는 얘기가 되니 말이다. 하긴 구미호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익히 알려져 있듯이 말은 사용자의 가치판단을 중심으로 표현된다. 들짐승이나 날짐승, 산짐승 같은 말은 곧잘 쓰이지만, 물짐승이나 집짐승 같은 말은 일상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사전에 어엿하게 등재된 낱말이건만 우리는 이들을 줄곧 물고기, 가축이라 부른다. 동물이라는 점에서 모두가 한 부류임에도 ‘짐승’이라는 말이 풍기는 인상이 물고기나 가축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인간 중심적 판단이 개입된 결과다. 벌레나 곤충은 징그러워서 안 먹는 것이 아니라, 안 먹기 때문에 징그럽다고 규정됐다는 어느 인류학자의 통찰이 힘찬 대목이다.
3월, 봄이다. 봄은 만물에 골고루 스며들어 저마다의 겨울을 깨고 활기를 움트게 한다. 봄은 그렇게 공평무사하다. 선입견 없이 생기를 베푸는 덕에 봄은 화사하고 따사롭다. 봄을 반기는 이유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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