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오늘보다 내일 더 사랑하길
[경향신문]
“근데 너는 절대 먼저 연락을 안 하더라.”
함께 차를 마시다 친구가 말했다. 당시 그녀는 파리에서 박사논문을 마무리 중이었고, 난 박사후연구원으로 그곳에 일 년 동안 머물고 있었다. 소속된 연구기관에서는 영어를 사용했던지라 내가 구사할 줄 알던 불어의 한계치는 “제 전공은 법학이며, 법사회사와 법문학으로 박사논문을 썼습니다. 죄송하지만 이제부터 영어로 말해도 되겠습니까?”였다. 그러니 정착과정에 도움 받을 일이 이따금 발생했다. 바쁜 친구에게 폐를 끼칠까봐 나는 두려웠다. 언제든 네가 편한 시간에 맞출 수 있다며, 먼저 연락 줄 때까지 매번 기다렸다. 그것이 도리어 친구를 서운하게 하였음을 한참 지나서야 알았다. 방해될까봐 연락하지 않던 통에 그녀는 언제쯤 어떤 도움이 필요할지 미루어 짐작하는 수고로움을 감내했던 것이다. ‘너한테 민폐가 될까봐’의 조심스러움 너머엔 ‘내가’ 거절당할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의 배려는 자기중심적이었다.
생일을 맞이한 내게 친구는 맛있는 점심을 사겠다고 했다. 루이대왕 고등학교를 지나 라탱 지구 오래된 식당골목으로 데려가주었다. 논문 막바지 작업 중이라 도서관 갈 때 외엔 거의 외출하지 않던 친구가 일부러 거기까지 나온 상황도, 긴 유학생활로 주머니가 넉넉지 않았을 그녀가 외식비를 부담하는 상황도 내 탓 같아 면목 없었다. 그래서 추천해준 메뉴 아닌 제일 저렴한 걸 골랐고, 막판에는 내가 사겠다고 고집 부려 친구를 당황케 하였다.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계산서를 이쪽으로 끌어당기려고 식사하는 내내 조바심치는 표정 대신 모처럼 맛난 걸 먹으며 환해진 얼굴을 그녀는 보고 싶어 했을 것임을. 1유로 더 싼 메뉴인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으리란 사실을. 프랑스식 전통요리를 맛보게 해주고 싶어 그날 그녀는 어렵게 시간과 돈을 할애했던 거다. 내가 표현했어야 할 감정은 친구가 지불한 바에 대한 미안함이 아니라, 이를 기꺼이 내어준 우정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나의 미안함은 자기중심적이었다.
어느 저녁, 가까운 동료 서넛이 모처럼 아랫마을로 내려가 식사하기로 했다. 운전 못하는 나를 위해 한 분이 차 몰고 데리러 와주셨다. 차문을 열자 뒷좌석에 바람막이용 점퍼가 놓여 있었다. 주말 산행 후 치우지 못했다며 그냥 밀쳐두라 하셨는데, 엉뚱하게도 그날 내가 고집 부려 상대의 일과를 엉키게 만든 사실이 떠올랐다. 의자에 놓인 그 옷이 “이 고집쟁이야, 저리 가!”라고 외치는 것만 같았다. 웃고 떠들며 저녁 먹던 중 나도 모르게 자꾸만 표정이 어두워지려고 했다. 그러고 얼마 후 유사한 상황이 재현되었을 때 보았다. 자신이 앉을 자리에 흐트러져 있던 점퍼를 발견한 다른 분은 의기소침해하는 대신 그걸 옆에 차곡차곡 개켜두던 것을. 부끄러운 마음이 일었다. 여전히 자신 안에 갇혀 있었구나. 내 감정은 배려심이나 미안함조차 아니었구나.
일생 동안 우울증을 앓았던 철학자 알튀세르는 자서전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에 이렇게 적었다. “그 뒤 나는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고 생각한다. 이는 자신을 부풀리고 과장하며 주도권을 쥐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그의 욕망과 리듬을 존중하며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것, 그러나 하나하나의 선물을 기쁨으로 받아들임을 배울 줄 아는 것, 자만하지 않고 강요하지 않은 채 똑같은 선물을, 똑같은 기쁨을 상대에게 줄 줄 아는 것이다. 요컨대 단순한 자유다. 세잔은 무엇 때문에 생트 빅투아르 산을 매순간 그렸겠는가? 그것은 매순간의 빛이 하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이란 그 모든 비극에도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다.”
미래가 오래 지속되는 것이라면, 그 모든 비극에도 여전히 삶이 아름다울 수 있다면, 아픈 깨달음이 너무 늦은 것은 아니기를. 오늘보다 내일 더 사랑하길 소망한다.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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