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 뜻 살린 '하늘북' 울려 흙바람 일으켜온 전사였지요"

한겨레 입력 2021. 3. 2. 21:46 수정 2021. 3. 2.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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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쥐고 나무 밑에 쓰러진다 혁명군아 혁명정신 따르다가 혁명전사 되었구나. 만리장천 무주고혼 정처없이 떠돌다가. 혁명정부 이루거든 다시 살길 바라노라. 공중 나는 까마귀야 시체 보고 울지마라. 몸은 비록 죽었으나 혁명정신 살아 있다."

쉰아홉, 육순을 넘기지 못한 나그네 가는 길 역병이 돌고 있는데도 '혁명정부 이루거든 다시 살길 바라'는 추모객이 경향에서 모였다.

그러나 '하늘북소리'는 크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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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 이의 발자취] 조관호 전 한겨레가족 청주모임 회장을 그리며
가톨릭집안 태어나 서강대 종교학 전공
기자 그만두고 낙향해 지역 시민운동
청원 고드미마을에 흙집 짓고 농부로
1992년 '한겨레가족 청주모임'도 꾸려
농민운동·통일운동·생명운동 앞장
지난 2월23일 별세한 고 조관호(바르롤로메오) 전 한겨레가족 청주모임 회장은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시동리의 성요셉공원에 묻혔다. 향년 59. 하늘북 제공

“가슴 쥐고 나무 밑에 쓰러진다 혁명군아 혁명정신 따르다가 혁명전사 되었구나. 만리장천 무주고혼 정처없이 떠돌다가. 혁명정부 이루거든 다시 살길 바라노라. 공중 나는 까마귀야 시체 보고 울지마라. 몸은 비록 죽었으나 혁명정신 살아 있다.”

지난달 25일, 소리꾼 조애란이 부르는 ‘추도가’에 실려 그이가 이승과 작별을 고했다. 텅 비었다. 더 오래 살았어도 되련만 그이 데려간 세월이 참 야속하다. 쉰아홉, 육순을 넘기지 못한 나그네 가는 길 역병이 돌고 있는데도 ‘혁명정부 이루거든 다시 살길 바라’는 추모객이 경향에서 모였다. 누가 정하지 않은 시민사회장이었다.

조관호 동지! 조용한 지역 활동가였기에 대부분 이름이 낯설 테다. 그러나 ‘하늘북소리’는 크게 울렸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베이징에서 펴낸 잡지 <천고>에서 이름을 딴듯, 청주 시내에 ‘하늘북’을 열고 평화와 통일, 지역과 언론, 친일과 적폐청산, 생명평화 등 담론을 이끌어왔다. 통일 강연을 열고, 민족문제를 고민하고, 언론주권을 논하고, 투병하는 활동가를 돕는 일에 나서는가 하면, 재미동포 신은미씨의 책을 전국 각지의 도서관에 보내는 일까지 지역에서 크고 작은 일을 세심하게 챙겼다.

‘한겨레가족 청주모임’. <한겨레>가 태어나고 4년째 되는 해에 창립했으니 어언 서른 성상이다. 자주·민주·통일의 깃발 아래 독자들이 스스로 모여 지역활동을 해온 그 긴 세월, 동지는 그 한복판에 있었다. 한겨레 가족모임 소식지를 만들어 일일이 보내고, 사람을 모으고, 새 이야기를 만드는 등 자잘한 일을 맡아왔고, 그 적공으로 회장이 되어 모임을 이끌기도 했다.

‘하늘북’은 동지의 아지트요, 지역 담론이 샘솟는 사랑방이었다. 하필 ‘하늘북’이었을까?. 단재 선생과 인연 때문이었겠다. 동지는 일찍이 한국가톨릭농민회 청주교구와 우리밀살리기운동 충북본부 등 농민단체 실무책임자로서 1990년대 중반 단재 선생 고향인 동청주 낭성땅 고드미 마을로 스며들었다. 고드미는 청주시 낭성면 귀래리에 딸린 농·산촌으로 ‘곧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서 유래됐고, 단재 선생의 묘소도 있다. 동지는 고드미 마을에서 단재 선생을 기리면서 녹색농촌체험마을을 꾸리고, 흙집 짓고 고치는 일에 열심이었다. 언론에선 ‘고두미에 흙바람 분다’며 마을과 그의 활동을 주목했다.

서강대 종교학과를 나온 동지는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치우치지 않고 다른 종교인들과도 늘 교류했다. 서른 초반에 서울에서 전공을 살린 종교잡지 기자 노릇을 하다 그만두고 변방 산골에 깃들어 살면서 농사를 짓는 한편, 저 낮은 곳을 향하여 ‘하늘북’을 열어 변혁을 추구했다. 이땅 농민운동이 ‘투쟁에서 생명평화로’ 발걸음을 옮길 무렵 귀농한 동지가 다시 지역 사회활동가로 변신한 내력은 다소 뜻밖이다. 그러나 동지는 스스로 그 길을 걸었다.

이제 이승에선 만날 수 없다. 저승에서 함께 만나 그토록 좋아하던 막걸리로 회포 풀어보자. 동지가 즐겨 부르던 노래 ‘가뭄’이 귓전에 맴돈다. 간난과 신고를 이겨내고 자주와 창조를 이뤄낸 동지, 모든 걸 내려놓고 이제 편히 쉬시라.

“갈숲 지나서 산길로 접어 들어와 몇구비 넘으니 넓은 곳이 열린다. 길섶에 핀 꽃 어찌 이리도 고우냐. 공중에 찬바람은 잠잘 줄을 모르는가. 에헤야 얼라리야 얼라리 난다 에헤야. 텅 빈 지게에 갈잎 물고 나는 간다.”

박찬교/김의기기념사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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