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객석을 보면 은혜가 생각난다

2021. 3. 2.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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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태 월간 객석 발행인
김기태 월간 객석 발행인

올해는 1984년에 창간된 '객석'이 서른일곱 번째 생일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1984년 3월호가 창간호이니 매년 3월은 '객석'의 생일과도 같은 달이지요. 초심을 잃지 말자는 의미에서 제 서가에는 창간호가 늘 꽂혀 있는데, 그 내력을 잠시 옮겨 볼까요? 1983년 11월 11일 등록. 발행처 주식회사 예음(禮音). 주소는 서울 중구 충무로 1가 24-3. 가격 2,900원. 뉴욕, 파리, 로스엔젤레스, 런던, 로마, 프랑크푸르트, 홍콩, 도쿄에 지사를 두었으니, 그때부터 글로벌하게 움직였네요.

음악의 '음'자도 모르던 제가 지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비분강개한 마음으로 '객석'을 인수한 지 벌써 7년이 지났네요. 수많은 책들을 만들면서 많은 예술가들을 만났습니다. 손주뻘인 10대부터 부모님 연배인 90대까지 연령대도 참 다양합니다. 만나서 그들의 고민과 삶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동안 객석 편집실은 음악가와 예술가들의 사랑방처럼 자리 잡았지요. 이처럼 음악을 많이 다루는 잡지를 간행하고 있지만, 저는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음악가는 되지 못할 것을 압니다. 뛰어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악보를 외울만한 암기력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같은 곡을 수백 번, 수천 번 연습해야 하는 끈기는 더더욱 없을 테니까요. 아마 이러한 능력과 재능은 저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도 없는 초능력과도 같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음악가들을 볼 때마다 살짝 불안하기도 합니다. 음악에만 매진하는 탓에 때로는 세상사와 동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기 때문이죠. 연습이란 곧 혼자만의 시간이고, 설령 오케스트라의 단원이라 하여도 연습실에서 자신이 연주할 파트의 완성도를 높이느라 그는 늘 군중 속의 고독을 필수로 합니다.

어떻게 보면 참 외로운 직업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평생 자기와의 싸움인 것이죠. 조금이라도 연습을 게을리하면 손이 굳어 제 실력이 나오지 못하니, 악기나 무대와 동떨어지면 그 불안함이 표정에 드러나기도 합니다.

또한 여러 음악가들을 만날 때마다 그의 노력과 열정에 감탄하곤 하지만, 한편으로 그와 함께 하는 가족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음악가들의 어머니는 어릴 적부터 거의 그림자처럼 붙어 다닙니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가정생활에 충실할 수 없어 아버지와 다른 형제들은 알아서 제 할 일들을 해야 합니다.

언젠가 음악도를 자녀로 둔 어느 아버지가 한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지금은 대기업의 임원이 되어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지만, 중견 직원에 불과할 때는 고액의 레슨비 때문에 아침마다 아내와 얼굴을 마주치는 것이 겁났다고 하더군요.

어느 중견 교수의 리사이틀에서의 일도 기억나네요. 공연장 티켓 창구에서 발권을 하려는데, 구순이 넘으신 그 아버지가 공연장 로비 한가운데 서서 사람들에게 일일이 인사와 함께 공연 팸플릿을 건네고 계셨습니다. 예전에 정부 고위 관료를 지냈던 그 아버님은 막내 딸의 교육과 성공을 위해 그러한 시간을 얼마나 보내셨던 것일까요?

결혼을 한 음악가들은 배우자들의 희생과 함께 성장하기도 합니다. 특히 외국 유학 중 서로 눈이 맞아 결혼했지만, 아내의 경우 출산과 자녀교육 때문에 공연 활동을 양보하기도 하고,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남성 음악가는 처가의 배려와 지원 속에서 성장하는 모습도 많이 보았습니다. 한 명의 음악가가 나오기 위해선 본인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스승과 가족의 피눈물 나는 노력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과정을 잘 아는데, 그들이 모든 영광을 자신의 노력과 재능으로만 돌릴 때는 조금 씁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숙한 음악가들은 인터뷰나 기사를 통해 그 은혜를 '감사의 인사'로 표현하곤 합니다. 부모에 대한 감사, 스승에 대한 고마움, 배우자와 동료에 대한 감사 등등.

그렇듯 천신만고의 과정을 거쳐 겨우 주목을 끌기 시작한 요즘 젊은 음악가들의 소망은 참 소박합니다. 기성세대보다 현실을 보는 눈이 더 명확하고 정확하다고 할까요. 그들은 스승들의 시대와 달리 교수로의 진입이 쉽지 않고, 레슨으로 떼돈을 벌 수 있는 시대도 지나갔음을 직감합니다.

솔직히 실력이 있어도 국내 오케스트라 진입이 쉽지 않은 경우가 많고요. 성악가들의 경우는 캐스팅에 연연해하지만 설 무대 자체가 너무나도 한정되어 있으니 유럽 무대를 떠돌아야 하는 게 현실입니다. 연주자, 지휘자들도 해외콩쿠르 석권의 희소식을 끊임없이 전해오지만 그들이 고국의 무대에 다시 오르기까지는 학연과 지연, 혈연이 복잡하게 작용하는 환경에 적응해야 하고, 그나마 첫 기회를 얻어도 지속적인 공연으로 이어가기 힘든 상황입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그들을 통해 우리 사회를 되돌아보곤 합니다. 여러 가족과 친지, 스승들의 관심과 지원 속에서 성장한 음악가들이 좋은 기회를 더 많이 나눌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말이죠.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와 마찬가지로 예술계도 결국은 실력 있는 사람이 살아남기 마련이겠지만 어릴 때부터의 피 나는 노력과 주위의 배려 그리고 본인이 품었던 원대한 꿈을 고려한다면 기회균등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베풀어야 할 최소한의 배려가 아닐까요?

그런 면에서 '객석'은 매달 많은 에술가들을 선보이는 '글자와 종이로 엮은 리사이틀'이라는 생각도 드네요. 37년째 변함없는 여러분들의 관심,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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