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프리즘] 따를 것인가 버릴 것인가 / 김경락

김경락 2021. 3. 2.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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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프리즘]

김경락 ㅣ 산업팀장

재계 1위 그룹을 이끈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시련을 겪고 있다. 국정농단 사건에 연루돼 횡령·배임죄로 징역을 살고 있으며 법무부의 취업제한 통보로 재벌가에선 흔한 ‘옥중경영’도 제동이 걸렸다. 또다른 사건인 삼성물산-제일모직 불법합병과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사기 건으로 현재 1심 재판 역시 진행 중이다. 이재용 부회장에겐 ‘산 넘어 산’인 형국이다.

이 부회장의 고난이 삼성의 기업가치에 미칠 영향에 대해선 갑론을박할 수 있으나, 이 부회장이나 삼성 수뇌부로선 원하지 않는 사태 전개인 건 분명하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된 원인을 꼽을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지배구조 문제다. 상법의 취지는 이사회를 중심으로 견제와 균형이 이뤄지는 지배구조를 요구하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삼성의 공식·비공식 의사결정 단위들은 동종교배에 가까운 인사로만 구성됐으며, ‘총수를 위해서’ 기능했다. 삼성과 이 부회장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과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처리 변경에 잠복한 위험 요소를 사전에 발견해 조정하기는커녕 내처 달리기만 했던 까닭이다.

물론 이런 풍경은 재벌그룹에선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이 부회장과 삼성 수뇌부는 억울한 감정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갈수록 교묘해진 기업과 지배주주들의 일탈을 막기 위해 규제가 발전하면서 ‘어제는 무사히 넘어갔던 일’도 오늘날엔 돌이키기 힘든 과오가 되기 십상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본격화된 상법과 공정거래법 등의 거듭된 개정으로 회사 기회 유용이나 총수 사익 편취 등에 대한 정부 감시망은 한층 촘촘해지고 법원 판결은 매서워졌다. 규제의 진화에 발맞추지 못한 낡은 지배구조와 여기에서 비롯된 ‘하던 대로 관행’이 오늘날 이 부회장의 불행을 낳은 씨앗이라고 본다.

또 한가지 빼놓을 수 없는 환경 변화는 자본시장의 성숙이다. 연기금의 의결권 행사는 한결 활발해졌을 뿐만 아니라 ‘스마트 개미’로도 불리는 똑똑한 소액 투자자들이 부쩍 늘었다. 이로써 ‘경영은 지배주주가 아닌 전체주주를 위한 활동’이란 교과서에만 적혀 있던 명제가 이젠 펄떡펄떡 뛰는 시장의 기본 명제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재벌가들이 위기에 몰릴 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내놓던 ‘국익론’도 글로벌 시장을 주유하는 ‘서학 개미’ 앞에선 힘쓰기 어렵다. 최근 주요 기업들이 부쩍 이에스지(ESG, 환경·사회·지배구조) 가치를 강조하는 건 경영진도 이런 변화를 인지하기 시작했다는 방증이다.

이런 점에서 올해 3월 다수 기업의 주주총회는 달라지는 규제·시장 환경이 현장에서 얼마나 작동하는지를 확인할 좋은 기회다. 특히 지난해 말 상법 개정으로 도입된 ‘감사위원 분리선출과 3%룰’이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궁금하다. 마침 30일 예정된 한국앤컴퍼니(옛 한국타이어그룹) 주총은 이 모든 것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이벤트다.

주주제안으로 회계·지배구조 전문가인 이한상 고려대 교수가 사외이사 겸 감사위원 후보에 이름을 올렸고, 최대주주(지분율 42.9%)인 조현범 사장 쪽은 장인이 대통령이던 시절 청와대에 근무한 김혜경 전 청와대 비서관을 추천하며 맞불을 놨다. 조 사장은 자신의 반대파는 감사위원으로 받지 않는 기존 재벌가의 관행을 따른 셈인데, 그 결과는 예단하기 어렵게 됐다. 상법 개정으로 조 사장은 3% 초과 지분에 대해선 의결권을 쓸 수 없어서다(정부안을 국회가 뒤틀지 않았다면 조 사장 추천 인사의 낙점 가능성은 더 줄었을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이 다수당인 21대 국회의 법안 수정 첫 수혜자가 엠비 사위라는 건 아이러니다).

5% 남짓 지분을 들고 있는 국민연금이 ‘의결권 행사 지침’에 따라 주주권을 적극 행사할지도 관전 포인트다. 나아가 한국앤컴퍼니는 주요 주주를 제외한 나머지가 대부분 소액 투자자로 구성된 터라 ‘스마트 개미’들의 활약도 기대된다. 회삿돈을 빼돌린 혐의로 원심에 이어 항소심에서도 유죄(징역 3년, 집행유예 4년)가 인정된 조 사장을 시장은 어떻게 평가할까.

sp9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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