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에 걸친 자기혐오의 삶.. 말과 교감하며 자유를 얻다 [Guideposts]

정순민 2021. 3. 2.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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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식증·폭식증 이겨낸 조애너 코필드
식이장애를 겪던 내게 행복이란 없었다
아들을 위해 말 두마리를 들였을때도
그들과 가까워지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전문 훈련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말은 공포를 느끼면 공포로 대응해요"
시간을 들여 근육을, 갈기를 보듬었고
그들의 눈에서 공포가 사라졌을때
나도 더이상 음식을 토해내지 않았다
말들에 섞여 찾은 평화, 그건 기적이었다
거식증과 폭식증에 시달리던 조애너 코필드는 자신이 키우는 말들과의 소통을 통해 자유와 행복, 그리고 평화를 만들어내는 기적을 경험했다. 말을 매개로 한 치료법인 '내추럴 허드 모델'을 개발한 그는 "하나님께서 말들의 사랑을 통해 두려움이나 심판 없이 살아도 된다고, 그저 그대로 있으라고 허락해 주신 것 같다"고 말했다.
동물과의 교감을 통해 육체적·정신적 장애를 치료하는 '내추럴 허드 프로그램'에 참여한 한 참가자가 말을 끌어안고 있다.

말을 들이는 게 올바른 결정이었을까? 호스 위스퍼러(말 훈련사)가 진입로에 들어서기를 기다리며 나는 이리저리 서성였다. 말 관련 잡지에서 훈련사의 정보를 찾았다. 까다로운 말을 데리고 있는 사람을 돕는다고 했다. 나는 절박했다. 내 말 두 마리는 내게서 달아나거나 사납게 대들었다. 두 녀석을 진정시킬 수 없다면? 삶의 많은 부분에서 그랬듯이 말과의 관계도 실패한다면?

당시 열 살이던 아들 리처드는 몇 달 전에 작은 조랑말 거스를 입양하자고 나를 설득했다. 리처드는 토요일에 이웃의 말들을 돌보는 일을 했다. "부탁이에요, 엄마. 제발요! 정말 잘 돌볼 수 있어요." 아들은 간청했다. 우리는 땅이 있었고 거스는 버림받았다. 녀석은 집이 필요했다. 친구들이 내가 말을 입양한 것을 처음엔 충격적으로 받아들이더니 이내 두 번째 말도 입양하라고 고집을 부렸다. "말은 무리와 함께 있어야 안전하다고 느껴." 그래서 거스가 외롭지 않도록 짙은 적갈색 암말 브론웬을 들였다.

'무슨 일이 일어날 거라 생각했을까?' 호스 위스퍼러를 찾아 창밖을 내다보며 자문했다.

완벽한 조화? 우리 모두 잘 지내기를 간절히 바랐다. 나는 언제나 동물을 사랑했다. 그러나 작고 다혈질인 거스는 걷어차고 물어뜯었다. 그리고 예전 집에서 다정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던 브론웬은 내가 가까이 갈 때마다 방목장의 가장 외진 구석으로 달아났다. 도대체 뭘 두려워하지? 나는 왜소하고 온순한데. 날 두려워하는 사람은 나뿐인데.

기억하는 한, 두려움이 내 삶을 휘둘렀다. 하나님, 죄악, 나의 본성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나는 교구 목사의 딸로 성장했다. 우리 가족은 양쪽 모두 5대에 걸쳐 영국 국교회 성직자였으니 종교와 하나님에 대해 거의 금욕적이라고 할 정도로 매우 진지했다. 어렸을 때는 일요일마다 아버지가 죄악과 천벌의 공포를 설교하는 걸 들었다. "죄악은 고의로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고 반항하는 행위입니다. 성 바울은 모두가 죄인이며 신께 미흡하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나 자신을 벌주려고 10대 초반부터 음식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때는 1970년대 중반이었다. 당시에는 거식증에 걸린 여자아이에게 무엇을 해주어야 하는지 아무도 몰랐다. 나처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에게 즐거움을 누릴 자격은 없다고 생각했다. 행복은 당치도 않았다.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서 그저 사라져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나는 점점 더 왜소해지고 야위어 갔다. 내 건강을 염려한 어머니는 날 정신병원에 보냈다.

끼니때면 간호사들이 보초를 섰고, 매 시간 진정제와 우유 한 잔을 건넸다.

"이거 마시렴, 조애너."

간호사들은 고약하지 않았지만 환자들이 무서웠다. 그들이 의자에서 앞뒤로 흔들거나 겉보기에는 마구잡이로 덤벼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나는 온실 속 화초 같은 10대였다.

'여기서 나가려면 체중을 충분히 늘려야 해.' 나는 마음먹었다. 3개월 후, 살이 충분히 찌자 의사들은 집에 가도 된다고 했다. 부모님 앞에서는 먹었지만 몰래 토해내는 폭식증에 걸렸다.

어른이 될 때까지 식이장애를 숨겼다. 스물여섯 살에 스무 살이나 많은 남자와 결혼을 했다. 그를 사랑했던가? 아니면 그저 쓸모 있게 그의 가정을 지키고 아이를 낳고 싶었던가? 그것도 잘 해내지 못했다. 수년간 임신하려고 애쓴 후에야 리처드를 얻었다.

40대 초반이 되자 파괴적인 악순환에 걸려들어서 뼈만 남은 인간이 되었다. 폭식하고 토해내고 다시 폭식하고 토해냈다. 거스와 브론웬을 데려오는 일에 찬성한 건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아들을 기쁘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3개월이 지난 지금, 전문가를 불렀다. 호스 위스퍼러와 조수가 도착했고, 둘을 방목장에 데려갔다. 브론웬은 날 보자마자 꽁무니를 빼고 반대편 구석으로 달아났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브론웬을 해칠 생각이 없다는 걸 어떻게 알려주죠?"

눈물을 눌러 참으며 말했다. 호스 위스퍼러는 문을 열고 침착하게 브론웬에게 걸어갔다. 조금 전까지 두려움으로 휘둥그레졌던 녀석의 눈이 편안해졌다. 호흡도 안정적이었다.

"바로 그거야."

호스 위스퍼러가 속삭였다. 이내 그는 브로웬이 원을 그리며 움직이다가 뒷걸음치고 옆으로 발걸음을 옮겼다가 귀 기울이게끔 했다. 브론웬의 눈은 넋을 잃고 호스 위스퍼러에게 고정돼 있었다.

깜짝 놀랐다. '나는 왜 저렇게 못하지?'

"브론웬은 그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는 거예요. 말은 침착함에는 침착함으로, 공포에는 공포로 대응해요." 호스 위스퍼러의 조수가 말했다.

목구멍에 덩어리가 걸렸다. 지난 몇 달 동안 나는 브론웬과 어떻게 소통했던가. 내가 브론웬에게 어떻게 비쳤을지 상상했다. 공포와 고통을 방목장까지 끌고 와서는 온몸으로 "위험해!"라고 외치는 여자. '녀석이 겁먹은 게 당연해. 그저 내게서 본 대로 반응했을 뿐이야.'

거스도 마찬가지였다. 녀석은 자존심도 없는 내 모습에 응수했던 거다. 내가 평온하고 긍정적인 모습으로 말들에게 다가가지 못하는데 어떻게 녀석들이 그렇게 해주길 바라겠는가.

말과 치유에 관한 책들을 급히 읽어 내려갔다. 거스와 브론웬에게 다가가는 방식에 세심히 주의를 기울였다. 더는 걱정하고 부끄러워하면서 긴장한 채 방목장으로 급히 달려가지 않았다. 그 대신 브론웬에게 천천히 걸어가서 근육이 만들어 내는 잔물결, 에너지의 움직임을 하나씩 살폈다. 녀석의 몸을 점점 더 많이 알게 될수록 내 몸도 더 잘 알게 됐다. 내가 '어떻게 느끼지?' 차근차근 내 머리, 심장, 위장, 팔다리에 집중했다. 모든 감각이 공포와 맞닿아 있음을 알아차렸다. 부정적인 감정을 날숨으로 내뱉자, 브론웬은 내가 좀 더 다가가도록 허락했다. 수개월에 걸쳐 하루씩 브론웬과 나는 친구가 됐다.

어느 날 아침 그때까지 했던 것보다 더 용기를 내어 브론웬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내가 만져 보게끔 허락해 줄까? 심호흡하며 내게 집중했다. 수십년 동안 나는 이런 순간을, 평온함과 친밀함을 느낄 자격이 없다고 확신했다. 그 악순환을 깰 수 있을까? 손을 내밀었다.

"바로 그거야." 브론웬은 달아나는 대신 그저 날 지켜보면서 기다렸다. 그 눈에는 공포가 없었다. 호기심뿐이었다. 녀석의 목을 가볍게 스치면서 갈기를 따라 부드럽게 미끄러지듯 손가락을 움직였다.

슬며시 브론웬에게 팔을 둘렀다. 신령처럼 위대하고 재빠른 무언가가 우리를 통과하는 걸 느꼈다. 브론웬은 머리와 목으로 날 감싸고 껴안았다. 대단한 사랑과 친절이었다. 우리는 같은 무리, 같은 대우주의 일부였다. 평생 밀쳐냈던 선(善), 내가 스스로 응징했던 선을 브론웬에게서 느꼈다.

브론웬은 내가 쓸모없다고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도 내가 무익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실지도 모른다.

패배주의자 같은 감정을 다루려고 매일 명상과 호흡 훈련을 했다. '들이마시고 내쉬고 들이마시고 내쉬고.' 내가 정말 그렇게 부도덕했나? 스스로 벌주었어야 했나? 몸 안에서 고통과 공포가 누그러지기 시작하더니 새로운 안락함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브론웬이 와서 같이 산 지 2년이 될 때까지 억지로 토하는 일이 점점 줄었고, 그러다가 더 이상 구토를 원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하나님께서 브론웬의 사랑을 통해 두려움이나 심판 없이 살아도 된다고, 그저 그대로 있으라고 허락해 주신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도 브론웬 같은 말의 도움을 받으면 어떨까?' 그런 일을 하는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을까 싶었다. 작업을 시작했고, 이는 후에 내가 개발한 말 매개 치료법인 '내추럴 허드 모델'이 됐다.

브론웬과 독서를 통해 놀라운 현상을 배웠다. 개개의 말은 트라우마가 있을 수 있으나, 무리에서는 자연스럽게 공포가 해소된다. 말 한 마리가 '공포를 느끼며' 무리에 끼어들면 다른 말들은 그 공포가 유용한지 결정한다. 위험이 가까이에 있나? 무리가 스스로 지키기 위해 도망갈 필요가 있는가? 그게 아니라면 무리는 공포가 사라지게끔 내버려 둔다. 겁에 질린 말은 집단에 다시 섞여들고, 무리는 전체로서 다시 균형을 맞춰 정상적인 안정상태에 접어든다. 사회적 균형이 만드는 기적이다.

우리 마구간의 말이 늘었다. 9마리에서 15마리가 됐고, 결국 21마리에 이르렀다. 나는 결혼생활을 정리하고 웨일스로 이사했다. 말들이 자유로이 돌아다닐 땅이 충분한 곳이다. 의뢰인을 찾았다. 트라우마로 남은 기억에서 치유되고 싶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방목장으로 데려갔다. 그들이 자신의 두려움, 부끄러움, 부정적인 자존심을 자세히 들여다보길 바랐다. 우리는 같이 걸었고, 말들이 우리를 반겼다.

"무리에 섞이면 우리도 말들이 다시 균형을 맞추는 사이클에 들어가게 됩니다. 대단하지 않나요? 감당하고 있던 걸 내려놓으면 어떤 기분일까요?"

시간이 지나고, 수년 전 방목장에서 브론웬과 공유했던 사랑스러운 에너지가 내 몸을 가득 채웠다는 걸 알았다. 나는 하찮지 않았다. 벌을 받아 마땅하지 않았다. 그저 한 사람의 인간이었고, 모든 인간이 그렇듯 불완전했다. 말들은 그 점을 알았으며 날 심판하지 않았다. 거의 평생 지고 다녔던 자기혐오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다. 아버지도, 하나님도, 내 본성도 무서워할 필요가 없었다.

하나님은 내게 천벌을 내리는 외부의 힘이 아니라,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내면의 빛이셨다. 30년에 걸쳐 투쟁한 거식증과 폭식증에서도 회복하게 하셨다. 다시금 그것들을 떠올릴 때면 브론웬과 다른 말들이 방목장을 거니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행복하고 자유로우며 평화롭다. 바로 지금 내 모습이며 내가 누릴 만한 것이다. 기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가이드포스트(Guideposts)'는 1945년 노먼 빈센트 필 박사에 의해 미국에서 창간된 교양잡지로, 한국판은 1965년 국내 최초 영한대역 잡지로 발간되어 현재까지 오랜 시간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오고 있습니다. 가이드포스트는 실패와 좌절을 딛고 다시 일어선 사람들, 어려움 속에서 꿈을 키워가며 끊임없이 도전하는 사람들의 감동과 희망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런 감동의 이야기를 많은 분들의 후원을 통해 군부대, 경찰, 교정시설, 복지시설, 대안학교 등 각계의 소외된 계층에 전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후원을 통해 더 많은 이웃에게 희망과 감동의 메시지가 전달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글·사진=가이드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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