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무덤이 따뜻하게 느껴져요..희귀식물 '마지막 피난처'

조홍섭 2021. 3. 2. 15:5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애니멀피플]
식물원 수준 생물다양성..세계 곳곳서 확인
주검이 토양에 영양분 공급하기 때문 아니다
최고 180년 최소한 교란으로 상태 보전 영향
"난개발로 대부분 절멸위기, 무덤이 식물 살려"
무덤은 보기 힘들어진 작은 초원 생태계이다. 희귀식물이나 토종식물이 무덤 주변에 살아남기도 해 주목받는다. 2016년 3월 13일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시립공원묘지 모습. 파주/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급속한 도시화와 집약농업 때문에 교란되지 않은 자연을 찾기는 점점 어려워진다. 그러나 자연훼손이 심한 대도시나 농경지 한가운데서도 토종식물과 보기 힘든 희귀식물이 묘지에 터 잡고 있음이 밝혀지고 있다.

유럽에서는 2000년대 들어 도시의 묘지가 생물 다양성의 핫 스폿임이 여러 도시에서 분명해졌다. 2005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이뤄진 한 연구를 보면 이 도시에서 가장 많은 식물 종이 분포하는 곳은 당연히 식물원으로 675종이었지만 뜻밖에 두 번째로 다양한 585종의 식물이 묘지 24곳에서 발견됐다.

북미 대초원을 덮었던 키 큰 풀(톨그래스)은 농경지 개발로 대부분 사라졌지만 묘지는 당시의 경관을 타임캡슐처럼 보관한다. 일리노이 주의 60%를 차지하던 톨그래스 초원은 현재 0.01%만 남아있다.

“난은 무덤을 좋아해"

장기간 유지되고 교란이 비교적 덜한 묘지가 개발로 사라진 토종식물이나 희귀식물의 피난처가 되기도 한다. 터키 이스탄불의 한 묘지에서는 무려 280종의 고등식물이 확인됐다. 도시 전체에 견줘 이 묘지의 면적은 0.1%에 불과하지만 특산식물의 5.5%가 묘지에 살고 있었다.

난은 종종 묘지에서 발견된다. 터키에서는 조사한 묘지 300곳 가운데 208곳에서 난을 확인했는데 이들은 터키 자생란 종의 거의 절반에 가까웠다. 난은 묘지를 좋아한다는 말이 나올 만하다.

1979년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묘지에서 처음 발견된 디우리스 속 난.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최근 중국에서의 조사결과도 나왔다. 공 청 중국 농업대학 연구자 등은 화베이 평원에 있는 허베이 성 취저우의 묘지 199곳을 조사했다. 오랜 농경개발로 자연경관은 거의 없고 밀 경작지가 많은 이곳 주민들은 경작지에 대대로 무덤을 만들어 왔다.

연구자들은 “조사결과 작은 묘지일지라도 지역의 식물 다양성을 보전할 강력한 잠재력이 있음을 확인했다”고 과학저널 ‘사이언티픽 리포츠’ 최근호에 실린 논문에서 밝혔다. 면적이 2㎡인 한 묘지에서는 12종의 식물이 자랐다. 최대 400㎡ 평균 55㎡인 이들 묘지에서 확인한 식물 종은 모두 81종으로 경작지의 식물 종 34종보다 훨씬 다양했다.

게다가 묘지 식물 가운데 절반 가까운 35종은 곤충이 가루받이하는 종으로 상당수가 국화과에 속했다. 이에 견줘 경작지 식물 가운데 충매화는 3분의 1에 그쳤다.

묘지에 식물이 다양한 것은 주검이 토양에 영양분을 공급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최고 6대(18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최소한의 교란만 이뤄지는 상태로 보전됐기 때문이다.

할미꽃은 햇빛이 잘 비치고 건조한 무덤 생태계에 잘 적응한 식물이다. 김진수 기자

연구자들은 “주변의 집약적 농경지와 비교해 반 자연 서식지인 (묘지는) 농촌에서 토착 식물 다양성의 핫 스폿 구실을 한다”며 “묘지의 종은 경작지 밖 식물 종과도 다른 독특한 지역 식물 다양성을 간직하고 있다”고 논문에 적었다. 또 묘지 식물에서 꿀과 꽃가루를 따가는 곤충은 부근 농가의 과수에 가루받이하거나 해충을 잡아먹는 등 생태계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부터 묘지가 농지를 잠식한다고 판단한 당국이 신규 매장을 금지하는 바람에 묘지가 지닌 생태적 가치가 위태롭다”고 연구자들은 밝혔다.

대구에 살아남은 애기자운의 비밀

북방계 콩과 희귀식물인 애기자운. 대구의 무덤이 최남단 분포지이다. 김진석, 국립생물자원관 제공.

우리나라에서도 무덤이 지닌 독특한 미소 생태계 가치가 최근 알려지고 있다. 김종원 전 계명대 교수는 2017년 ‘한국식물생태보감 2-풀밭에 사는 식물’(자연과 생태)에서 “한국의 자연 초원식생을 이루던 식물은 광산개발과 난개발로 대부분 절멸 위기이지만 봉분 문화의 무덤이 그들을 살려내고 있다”며 “무덤이 이들 초원 식물의 임시 거처이자 피난처가 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김 교수 등은 멸종위기 북방계 콩과 식물인 애기자운이 대구 인근에서 동아시아 최남단 분포지를 이룬 것도 무덤 덕분이라고 2017년 학술지 ‘잔디와 잡초 과학’에 실린 논문에서 밝혔다. 이 식물은 중국, 몽골, 러시아 등에 분포하고 한반도에서는 북한이 주요 분포지이다.

1년에 한 두 번 예초와 수시로 이뤄지는 잡초 뽑기, 제초제 살포 등 인위적 간섭에도 무덤은 그곳에만 생존할 수 있는 식물이 따로 있다. 파주/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그러나 대부분의 애기자운이 분포하는 금호강 주변의 구릉 지대 무덤은 최남단 분포지이면서도 북방 분포지의 특성을 고스란히 간직한다. 바람길이어서 북풍에 고스란히 노출돼 평균기온이 대구 지역보다 1.7도 낮지만 남향의 해를 잘 받는 입지여서 봄철 잎과 꽃을 피울 수 있다.

또 해마다 1∼2번 예초 작업과 수시로 이뤄지는 잡초 뽑기, 제초제 투입 등 인간 간섭과 지배적인 잔디의 틈새를 파고드는 생존전략도 애기자운이 살아남는 데 기여했다. 연구자들은 “애기자운의 현지 내 보존을 위해 봉분을 포함한 뗏장에 대한 서식처로서의 이해와 적절한 생태적 관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인용 논문: Scientific Reports, DOI: 10.1038/s41598-020-80362-6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