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결] 목수정의 반계몽주의 / 김우재

한겨레 2021. 3. 2.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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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

 

김우재 | 낯선 과학자

프랑스는 위대한 나라였다. 18세기 그곳에선 계몽의 사상이 불타올랐다. 가톨릭교회와 왕권의 전횡에 저항하기 위해 계몽사상가들은 살롱에서 치열하게 토론했고, 그들의 급진적 사상을 익명으로 출판하며 싸웠다. 계몽사상가들 중 볼테르와 루소는, 프랑스대혁명 이후에 사망한 위인들만 안장되는 프랑스의 팡테옹에 예외적으로 안장되었다. 계몽사상이 프랑스대혁명의 이론적 근거와 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프랑스대혁명은 왕정을 종결시켰고, 근대적인 의미의 민주주의를 태동시켰다. 우리가 향유하는 근대민주주의는 프랑스와 그들의 계몽사상에 빚지고 있다.

프랑스 계몽사상의 뿌리는 영국이다. 볼테르는 뉴턴이 완성한 근대과학의 방법론적 틀에서 계몽사상의 강력한 근거를 발견했다. 볼테르는 물리학에 관한 수많은 저술을 남겼고, 뉴턴의 기계론적 세계관 속에서 프랑스의 사회적 진보를 꿈꾸었다. 백과전서파로만 짧게 알려진 디드로와 돌바크는 뉴턴의 기계론에서 벗어나, 당시 프랑스에서 막 피어나던 근대화학으로부터 전투적 유물론과 급진적 무신론의 근거를 찾았다. 물리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생명의 발생과 물질의 변화를 근대화학의 방법론과 발견들로 설명하면서 그들은 엄청난 분량의 백과전서를 저술해나갔다. 프랑스 계몽사상의 철학적 기틀은 근대과학으로부터 왔다.

프랑스의 정치사상을 한국에 널리 알린 인물은 홍세화다. 그는 1979년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자 프랑스 망명을 신청했고, 20년간 파리에서 택시운전사로 살았다. 이후 1995년 출판된 그의 책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홍세화는 프랑스에서 ‘똘레랑스’라는 개념을 수입했다. 한때 한국의 지식생태계는 홍세화가 수입한 똘레랑스에 대한 글과 논문으로 가득했다. 이후 한국 철학계는 프랑스의 현학적인 포스트모더니즘에 잠식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이 한창이던 당시, 미국의 지성계엔 소칼의 지적 사기로 ‘과학전쟁’이 일어났다. 물리학자이자 합리적 좌파였던 앨런 소칼은, 프랑스 좌파의 포스트모더니즘이 해롭고 독단적인 고등종교라 생각했고, 엉터리 논문을 포스트모더니즘 학술지에 출판한다. 계몽주의 시기, 과학적 세계관과 동조하던 프랑스 철학은 어느 순간 반과학의 상징이 되었다. 홍세화는 프랑스 계몽사상의 핵심인 근대과학을 쏙 빼고 똘레랑스를 수입했다. 볼테르의 계몽사상에서 유래된 똘레랑스는 근대과학적 맥락에서 사유되어야 한다.

목수정은 프랑스에 거주하는 작가다. 그는 스스로를 생활좌파로 규정하는 인물이다. 홍세화가 들여온 프랑스 유행이 시들해가던 무렵, 목수정은 다시 프랑스를 한국에 수입했다. 그에게 프랑스는 가장 진보적이고 선진적인 민주주의와 문화를 지닌 나라였고, 그의 글은 대부분 프랑스의 삶을 찬양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라는 초유의 사태 속에서 프랑스에 대한 그의 찬양은 점차 그림자정부론에 가까운 음모론으로 변질되었다. 코로나19 뒤엔 이 사태를 이용해 세상을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바꾸려는 세력이 존재하고, 그 세력은 우리의 자유를 위협한다는 것이 목수정의 생각이다. 그의 생각은 점점 더 위험한 형태로 진화 중이다.

며칠 전 목수정은 영국의 백신 접종 사후관리 시스템인 ‘옐로카드’의 문건을 근거로, 영국의 백신 부작용 신고가 4만건이 넘는다는 제목의 글을 썼다. 이 글은 마치 기자가 사실만을 나열한 것처럼 작성되어 있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목수정은 사실을 취사선택하고 자신의 신념에 맞지 않는 근거는 빼는 방식으로 백신에 대한 음모론을 만들어 퍼뜨리고 있다. 계몽사상가로 분류되지만, 사실 루소는 과학과 문명에 대한 비상식적 주장 때문에 반계몽주의자로 불린다. 과학이라는 상식적 세계관에서 멀어진 좌파는 극우보다 위험할 수 있다. 목수정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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