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文 정부 최대 규제 혁신 사업”이라는데

김정훈 경제부 차장 2021. 3. 2.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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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 31개 무력화한 가덕도法 통과시키면서 왜 다른 규제들은 꽁꽁 묶어 두는가

2018년 초 대통령 주재로 청와대에서 ‘규제혁신 토론회’가 열렸다. 발언하는 대통령 앞에 모래를 담은 투명한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회사가 새로운 아이디어로 사업을 하려고 할 때 일정 기간 기존 규제를 면제하거나 유예시켜 주는 ‘규제 샌드박스(sandbox)’를 도입하겠다는 뜻을 담았다고 했다. 규제 샌드박스란 어린이들이 자유롭게 노는 모래 놀이터처럼 규제로부터 자유로운 환경을 제공해 준다는 의미다. 그런데 그날 대통령 앞에 전시된 모래 상자는 너무 작았다. 맘놓고 뛰어놀기는커녕 상자에 아이들 손이나 제대로 들어갈까 싶었다.

연합뉴스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1월 22일 청와대에서 열린 규제 혁신 토론회를 주재하고 있다.

3년이 지났다. 정부는 그간의 규제 샌드박스 성과를 자평하는 200쪽짜리 사례집을 지난달 내놓았다. 샌드박스 규제 개혁이 ‘쇼’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는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사례집에 따르면 규제 샌드박스 일환으로 시판 커피에 적·청·황색 색소 사용을 허용했다. 카페라테 위에 여러 색깔의 이미지를 표현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휴대전화에 심어 놓은 디지털 운전면허증으로도 본인 확인을 할 수 있게 했다. 야영 시설은 반드시 천막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관광진흥법 규정을 피해 플라스틱 수지로 만든 텐트를 한시적으로 허용했다. 한 미용실에서 여러 명 미용사가 사업자 등록을 해 두고 샴푸실·대기실 등을 함께 쓰면서 영업할 수 있는 공유 미용실을 허용해 줬다. 정부가 한시적으로 없애줬다고 자랑하는 규정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애초부터 왜 규제로 묶어 둔 건지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많다. 대통령 앞에 놓여 있었던 모래 상자만큼이나 작은 혁신이다.

정부가 그러는 사이 새로운 규제들은 끊임없이 생기려 한다. 규제가 신설되거나 강해지는 것을 알려 주는 규제정보포털에 따르면 21대 국회가 개원한 9개월여 동안 규제 법안 1041건이 올라왔다. 하루 평균 3.8건이다. 19대 국회의 하루 규제 법안 발의 건수 1.9건이나 20대(2.7건) 때보다 더 많다.

이들 규제 법안이 국회 문턱을 넘으면 국민들이 돈 벌고 생활하는 데 족쇄가 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어떤 법안은 명절 있는 달에는 마트가 일요일에 휴점하지 말고, 꼭 명절 당일에 문을 닫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소비자는 명절엔 마트 대신 편의점으로 가야 한다. 공인중개사 시험을 절대평가가 아닌 상대평가로 바꾸자는 법안도 있다. ‘국민 자격증’으로 불리는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려는 사람들에겐 견고한 ‘진입 장벽’이 생긴다. 금연 빌딩에 국민건강증진기금으로 반드시 흡연실을 설치해야 한다는 법안도 나왔다. 왜 흡연실 만드는 데 준조세인 국민건강증진기금을 써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임대료 깎아 준 임대인은 금융회사에 대출금리 인하권을 요구할 수 있는 법안도 있다. 빌딩 주인이 자기 건물의 공실(空室) 사태를 막기 위해서 임대료를 깎아 줬어도 은행은 그 사람의 대출금리를 내려 줘야 할 수 있다. 이 정부는 역시 규제 푸는 것보다는 규제 만들어 내는 데 소질이 있다.

그런데 최근 반전(反轉)이 생겼다. 정치권은 가덕도 신공항을 추진하면서 수많은 규제를 한꺼번에 무시하는 저력을 보여 줬다. 가덕도 특별법은 군사시설보호구역, 폐수배출시설, 보전산지, 생태계보전협력금 등 31개 규제 허들을 무력화했다. 한 공무원은 가덕도를 두고 “이 정부 최대 규제 혁신 사업”이라고 혀를 찼다. 가덕도에만 특혜를 줘선 안 된다. 지금이라도 정부·여당은 ‘가덕도 정신’으로 무장해 다른 규제 개혁에 나서 볼 일이다. 10년째 국회에 계류 중인 서비스산업기본법 제정 등과 같이 규제 완화를 위해 당장 해야 할 일이 널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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