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전자책과 종이책
택배 박스를 뜯을 힘조차 없는 날에는 전자책을 산다. 인터넷 서점에서 책값을 결제하고 전자책 단말기로 다운로드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3분 미만. 집 소파에 앉아서 손가락 몇 번만 놀리면 읽고 싶었던 글을 곧장 볼 수 있다니. 게다가 종이책 대비 가격도 싸고 박스와 테이프 쓰레기도 안 나오며 두꺼운 책을 사도 손목 아플 일이 없으니 대체 일석 몇 조인지 모르겠다.
이 편리함에 중독되어 최근 전자책 사는 빈도가 높아졌다. 이러다 종이책을 아예 안 사는 날이 오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내 지갑과 환경을 생각하면 바람직한 변화다. 그러나 사실 난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을 꽤 즐긴다. 거듭된 책장 정리 끝에 살아남은 그들은 저마다 역사를 담고 있어서 책등만 봐도 추억 여행이 가능하다.
박형서 소설집 ‘토끼를 기르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것들’은 후배가 면지에 빼곡하게 편지를 적어 선물해준 책이다. “샤갈전 같이 보러 가기로 했는데 (과음하는 바람에) 못 가서 죄송해요”라고 쓰여 있어 볼 때마다 웃는다. 김화영 산문집 ‘행복의 충격’은 편집자가 된 대학 친구가 만들어서 내게도 왠지 애틋한 책, ‘꼭 읽어야 할 한국 단편 35선’은 고등학생 시절부터 끼고 살아 아마도 영원히 못 버릴 책, 데버라 리비 에세이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은 제주도 만춘서점에서 친구한테 추천받아 샀기에 각별한 책….
그러다 손을 뻗어 한 권 펼쳐보면 내가 긋긴 그었는데 왜 그었는지 모를 밑줄들과 내가 접긴 접었는데 왜 접었는지 모를 귀퉁이들이 간혹 나온다. 과거의 내 마음을 현재의 내가 짐작해보는 것 또한 즐거운 놀이다. 전자책 단말기에도 밑줄 긋기 기능이나 책갈피 기능이 있지만 이런 ‘갬성’을 충족시키는 건 역시 종이책이기에 가능한 일. 손바닥 위로 종이책의 물성을 느낀다. 표지 종이와 면지 색깔도 유심히 살펴본다. 예쁘구나, 생각하며 다시 책장에 잘 꽂는다. 추억이 꼭 물성 있는 것에만 깃든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나와 함께 낡아가는 물건은 역시 좀 애틋하다. 종이책과 결별할 날은 아직 멀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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