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연국칼럼] 거짓의 법복을 벗어라

배연국 2021. 3. 1.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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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로 김명수 꾸짖은 디케 여신
"가장 나약하고 불쌍한 사람"
'사법 개혁'으로 여론 호도 말고
대법원장에서 당장 물러나야

3·1절 아침에 법원 내부 통신망이 그날의 함성처럼 크게 울렸다. 김명수 대법원장의 온라인 입장문에 대한 디케 여신의 답신이 도착한 것이었다. ‘정의의 여신’ 디케는 법정에서 정의를 심판하는 법관들에게 어머니 같은 존재다. 영어권에서 대법원장을 ‘최고 정의(Chief Justice)’로 부르는 것도 정의의 아들로서 소임을 다하겠다는 법관들의 다짐일 것이다. 디케는 김 대법원장에게 어머니처럼 자상하면서도 준엄한 음성으로 매섭게 죽비를 쳤다.

나의 아들 명수야! 세상 사람들에게서 손가락질받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김뻥수” “거짓의 명수”라는 비난의 화살이 너의 가슴으로 날아들었다. 너는 모진 치욕을 잘 참아냈다. 그런 너를 보고 맷집이 무척 강한 사람이라는 평이 나오더구나.
배연국 논설위원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너야말로 가장 나약하고 불쌍한 사람이다. 사람의 마음에는 양심이 있지 않더냐. 양심은 모서리가 셋인 삼각형 모양이란다. 나쁜 짓을 하면 뾰족한 모서리가 콕콕 찌르지. 그래서 가슴이 따끔거리고 아픈 것이지. 네가 사람들의 어떤 비난에도 꿈쩍하지 않는 것은 그 모서리가 다 닳아 양심의 가책을 못 느끼기 때문일 거야. 양심이 망가졌으니 사표를 던질 용기가 어디서 생기겠느냐.

아들아, 양심은 법관에게 생명과 같은 것이란다. 정의의 횃불도 양심 없이는 타오를 수 없다. 내가 두 눈을 가린 채 저울을 든 것은 사람들의 지위나 이념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양심에 따라 공정하게 심판하겠다는 뜻이다. 너희 나라에서도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헌법에 명시하고 있지 않느냐.

옛날 영국에서는 법관들이 가발을 쓰고 재판을 했다. 왕당파와 의회파가 치열하게 싸움을 벌인 17세기 시절이었지. 왕당파 사람들은 긴 머리카락을 가진 반면 의회파에선 짧은 머리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로 인해 법관의 헤어스타일을 보고 재판 성향을 저울질하는 풍조가 생겨나자 양심에 따른 공정한 재판을 하기 위해 가발로 머리 모양을 감추었다. 요즘 너희 법관들이 똑같이 검정 법복을 입는 관행도 아마 그런 의지의 표출일 것이다.

3년 전 미국에선 이런 일이 있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이민정책에 반하는 판결을 내린 지방법원 판사를 “오바마 판사”라고 비난하자 존 로버츠 연방대법원장은 “우리에겐 오바마 판사와 트럼프 판사, 부시 판사나 클린턴 판사는 없다.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는 데 최선을 다하는 판사만 존재한다”고 쏘아붙였지. 그것이 정의를 받드는 법관의 태도란다. 그걸 외면하고 네가 권력에 기울어진 판결을 한다면 ‘문재인 판사’라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디케의 자녀들은 절대 누구의 판사가 돼선 안 된다. 오로지 참된 정의만을 섬기는 ‘디케의 판사’가 돼야 한다.

아들아, 너는 취임사에서 “대법원장으로서 법관의 독립을 침해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온몸으로 막아내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너의 말과 행동은 지금 너무 멀어졌다. 너는 바람보다 먼저 눕는 풀이다. 정치인들이 눈치를 보내기도 전에 그들의 의중을 살폈다. 거짓으로 치부를 가리려 했고, 그 거짓을 덮기 위해 또 거짓말을 했다. 사법 수장이 거짓말하는 풍토에서 법관들이 무슨 낯으로 법정의 위증을 다스리겠느냐. 이런 사법부를 누가 믿겠느냐.

너는 “사법개혁의 완성을 위해 헌법적 사명을 다하겠다”고 맹세했다. 뜻은 가상하다만 그건 네가 감당할 몫이 아니다. 네가 말하는 개혁이 무엇이냐. 개혁의 개(改)는 몸 기(己)와 때릴 복(?)으로 이뤄져 있다. 모름지기 개혁하려는 자는 자기 몸부터 때려서 바로잡는 법이다. 마루를 닦으려면 먼저 걸레를 깨끗이 빨아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만약 오물이 묻은 채로 청소한다면 마루가 깨끗해지겠느냐, 더 추해지겠느냐.

아들아, ‘최고 정의’의 법복은 원래 너에게 어울리는 옷이 아니었다. 이제 그만 ‘거짓의 법복’을 벗어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비양심의 나라에서 내가 거하는 양심의 나라로 돌아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배연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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