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 독재·오월 광주..쑥물같은 세월 저어온 푸르른 솔이여"

한겨레 2021. 3. 1.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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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 이의 발자취] 고 이훈우 동지의 영전에
지난 2월26일 신장암 투병 끝에 별세한 이훈우 전 <한겨레> 제작국장의 빈소에 광주 서중·일고 시절 동아리인 ‘광랑’ 회원들의 조화가 놓여 있다. 민청학련계승사업회 제공

1974년 전남대 시절 ‘민청학련’ 사슬

모진 고문에 스스로 목숨 놓을 뻔도

1982년 ‘님을 위한 행진곡’ 녹음·제작

2018년 유일한 테이프 기증하며 ‘공개’

1990년 ‘한겨레’ 합류해 묵묵히 ‘헌신’

노동자 동창생의 남겨진 딸 ‘자식처럼’

아끼는 이가 세상을 떠나면 그가 누구인들 쓸쓸하지 않을까만, 고 이훈우, 향년 68. 청소년기를 함께한 동년배인 자네의 부음은 더 안타깝네. 몇 해 전 뇌출혈로 쓰러진 뒤 예전보다 훨씬 가볍고 맑아진 모습으로 회복되지 않았던가. 생각해보면 우리가 함께 경험했던, 이른바‘민청학련 사건’ 때 전남대 상과대학 책임자로서 자네가 겪은 유별나게 혹독한 고문이 때 이른 이별의 시원인 듯싶어 다시 한 번 처연해지네.

‘시퍼렇게 쑥물 들어도 강물 저어가리라’하는 노랫말 기억하는가? 이 노래를 처음 듣는 젊은 세대는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할까? 어언 50년 전, 1972년 10월 유신체제를 완성한 저들은 영구집권의 꿈을 이뤘다고 생각하고 있던 1974년 4월, ‘전국민주청년학생 총연맹’의 이름으로 터져 나온 최초의 전국적 항거가 몹시도 두려웠겠지. 큰 키에 부리부리한 눈매가 의병대장이나 동학군 접주처럼 느껴지는 젊은 시절의 자네 모습을 보면, 취조하는 자들이 어떻게든 무너뜨리려고 했을 성 싶네. 광주 대공분실에서 며칠 동안의 모진 몽둥이질을 견디다 못해 자살을 기도했던 자네는 사흘이 지나서야 깨어났다지. 온 몸에서 옷으로 피가 배어나오는 고통스런 모습으로 말일세. 그뒤 자네가 서울 서대문구치소로 옮겨 와 우리는 뜻밖의 옥중 재회를 했었네. 그때도 내내 고문이 남긴 통증으로 밤마다 고통스러워했고 평생의 지병을 얻어 힘들어 했으니, 우리는 어떤 시대를 살았던 것인가?

짐승의 시간을 통과해온 내력을 알 리 없는 이들도 누구나 자네를‘따뜻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은 자네 영혼이 그 시간을 이겨냈기 때문이겠지. 감옥에서 나온 뒤 학원 강사를 하던 시절에도 늘 환한 얼굴로 어린 후배들을 꼼꼼히 챙겼다고 들었네.

자네가 기억력이나 수를 셈하는 능력은 물론, 기획력과 실행력이 우수하다고들 해서 나는 또 놀랐었어. 우직한 의리파, 꺾이지 않을 강골로만 생각해 왔었는데, 국내 굴지의 기업에서 광주 지사장을 하던 시절의 업무역량도 남달랐다니 말일세. 그런데도 1990년 월급이 그 1/3에 불과했던 신생 한겨레신문사로 망설임 없이 옮겨가서 2004년 제작국장으로 ‘명퇴’하기까지 묵묵히 헌신했었지. ‘한겨레’에서도 자네는 역량이 부족한 후배에게는 엄하게 가르치면서도 어려울 때면 진실한 도움으로 늘 든든한 버팀목 구실을 해주는 선배여서 회사를 떠난 이후에도 많은 후배들이 자네를 자주 찾았다지. 도리에 어긋나는 법이 없던 자네에게 송건호 선생 같은 대선배가 특별한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고도 들었어.

고 이훈우(왼쪽) 국장은 1982년 4월 광주 황석영 작가의 집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을 처음 녹음할 때 엔지니어링과 테이프 제작을 도맡아했다. 고인은 2018년 5월 ‘님을 위한 행진곡’이 담긴, 윤상원·박기순 열사 영혼결혼식 노래극 <넋풀이>의 유일한 녹음테이프 2개를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기증했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제공
고 이훈우(맨 앞줄 오른쪽 셋째) 국장은 ‘님을 위한 행진곡’ 녹음과 제작에 참여한 사실을 2018년 자택에서 테이프를 발견한 뒤에야 공개했다. ‘민청학련’ 동지들이 2018년 5월 ‘노래극 넋풀이 테이프 기증식’에 맞춰 광주역사기행을 함께했다. 민청학련계승사업회 제공

무엇보다 놀라운 건, 이제는 아시아 민주주의의 노래가 된, 1982년‘님을 위한 행진곡’과 그 노래극 <넋풀이> 제작 과정에 자네가 깊숙이 참여했다는 얘기였네, 그럼에도 2018년 유일한 원본 녹음테이프를 5·18기록관에 기증할 때까지 한 번도 그런 이력을 내세운 적이 없었던 자네였으니 말일세. 훗날 노래를 작곡한 김종률씨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기획과 녹음 엔지니어 등 드러나지 않는 일들을 맡은 자네가 없었으면 ‘님을 위한 행진곡’자체가 탄생할 수 없었다는 것을 알았지. 앞서 1981년에도 광주남도예술회관에서 사채와 자네의 등록금까지 털어낸 비용으로 ‘김종률 작곡 발표회’를 두 차례 열었고, ‘5월 광주’ 이후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을 담은 노래들과 홍성담의 항쟁 판화 영상을 소개한 그 공연은 꽉 찬 만석이었다니, 자네 안에는 시대를 위로하고 세상을 이끌어가던 유능한 ‘문화예술 기획자’도 깃들어 있었네.

그래도 내게 가장 선명하게 남은 기억은 자네와 막역하던 광주 서중·일고 동기 이길동 이야기일세. 손꼽는 학교 모임 중 하나인 ‘광랑’(향토반)에서 고교 1학년들이 김지하의 장시 ‘오적’을 함께 돌려 읽다 경찰서 조사를 받는 곤욕을 치렀다지. 고교 졸업 뒤 들어간 병무청을 그만 두고 노동운동을 하겠다며 철도노동자가 되었던 길동이가 과로로 너무 일찍 숨지자, 자네는 평생토록 그의 무덤을 관리했었네. 그가 남기고 간 딸 보름이를 지금껏 친자식처럼 보살피며 세세히 챙겨온 것도 자네였고.

삶의 강을 다 저어간 벗이여, 우리 삶 너머의 세계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 곳에서도 우리 푸른 솔로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좋겠네. 만날 때 마다 편하고 좋았던 우리들, 아직 충분하다 싶을 만큼 만나지 못한 것 아닌가? 우선은 그곳에서, 부디, 여기 우리들 세상 지켜보며 별빛으로 신호를 보내게. 우리는 자네가 보내오는 이야기를 이리저리 되새겨 보며 우리 이웃과 아이들에게 전해주겠네. 안녕!

최권행/서울대 명예교수·민청학련계승사업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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