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영화란 무엇인가" '미나리'가 골든글로브에 던진 질문

심윤지 기자 2021. 3. 1.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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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8일(현지시간) 열린 78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미나리>를 연출한 정이삭 감독이 ‘외국어영화상’ 수상자로 호명된 후 딸과 포옹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딸이 바로 제가 <미나리>를 만든 이유예요.”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열린 제78회 골든글로브 시상식. 정이삭(리 아이작 정) 감독이 ‘최우수외국어영화상’ 수상자로 호명되자 7살배기 딸이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정 감독은 한국인 이민자를 다룬 영화 <미나리>가 미국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유로 국적과 시대, 언어를 초월하는 ‘가족의 힘’을 첫손에 꼽았다.

■보편적인 가족 이야기

영화는 1978년 미국 콜로라도 덴버에서 태어나 남부 아칸소 시골 마을에서 자란 정 감독의 유년 시절 경험을 토대로 했다. 가족을 이끌고 아칸소로 이주하는 제이콥(스티븐 연)은 정 감독의 아버지이자 정 감독 자신이 투영된 인물이다. 윤여정이 연기한 순자도 정 감독의 실제 할머니를 모델로 했다. 그는 딸에게 보여줄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고, 자신이 딸 나이였을때 겪었던 기억들을 되새기며 이야기를 써내려갔다고 한다.

<미나리>는 가족을 소재로 한 기존 아시아 영화와도 차이가 있다.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페어웰>이 아시아계 미국인의 ‘정체성’을 설명하기 위해 가족이란 소재를 사용했다면, <미나리>는 미국과 한국의 문화 충돌이나 인종차별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대신 싸우고 반목하고 화해하고 사랑하는 가족 이야기에 보다 주목한다. “할머니한테서 ‘한국 냄새’가 난다”며 투덜대던 손자 제이콥이 어느새 할머니 순자와 사이좋게 화투를 치는 식이다. 이러한 보편성은 국적과 시대를 불문하고 많은 관객들에게 울림을 주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영화 <미나리>는 1980년대 한국인 이민자인 제이콥·모니카의 가족이 미국 아칸소주 시골에 정착해 살아가는 이야기다. 판씨네마 제공

<미나리>의 약진은 최근 젊은 아시아계 미국인 감독들이 주도하는 ‘아시안 웨이브’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날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2관왕을 차지한 <노매드랜드>의 클로이 자오 감독을 비롯한 미국 이민 2세대 아시아인들은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오롯이 녹인 영화들로 할리우드의 주목을 받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지난달 정 감독과 자오 감독을 비롯한 아시아계 감독 6명을 인터뷰하며 ‘아시아 웨이브’를 조명한 분석 기사를 내기도 했다.

정 감독은 이 기사에서 “초기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영화는 순수한 정체성 영화들로, 우리가 우리의 얼굴을 스크린에 비추기 위한 투쟁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금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우리가 ‘사람’으로서 우리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라며 “<미나리>가 ‘우리에 의한, 우리를 위한 영화’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는 우리가 극복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 <미나리>는 1980년대 한국인 이민자인 제이콥·모니카의 가족이 미국 아칸소주 시골에 정착해 살아가는 이야기다. 판씨네마 제공

■‘미국 영화’란 무엇인가

무엇이 ‘미국 영화’고, 무엇이 ‘외국영화’인가. <미나리>의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수상이 던진 질문이다. <미나리>의 제작사(플랜B)와 배급사(A24)는 미국 자본으로 설립된 미국 회사다. 정 감독과 주연배우 스티븐 연은 미국 국적을 가진 미국인이다. 하지만 골든글로브는 대사 대부분이 한국어라는 이유로 <미나리>를 ‘외국어영화’로 분류했다.

골든글로브를 주관하는 할리우드외신기자협회(HFPA)는 작품상 후보작의 경우 대사 절반 이상이 영어여야 한다는 ‘50% 규정’을 근거로 든다. 하지만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2009)은 대사의 영어 비중이 30% 정도임에도 작품상 후보에 올랐다. 이에 감독과 배우가 백인이 아니라고 해서 기준이 달라지는 것은 ‘인종차별’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지난해 중국계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페어웰>로 외국어영화상 부문 후보에 올랐던 중국계 미국인 감독 룰루 왕도 HFPA를 비판하고 나섰다. 왕 감독은 “올해 <미나리>보다 더 미국적인 영화를 본 적이 없다. 그건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이자 미국에서 아메리칸드림을 추구하는 이야기”라며 “오직 영어만 사용하는 것으로 특징짓는 구식의 규정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주요 외신들도 <미나리>의 외국어영화상 수상 소식을 전하며 영화의 ‘국적 논란’을 주요하게 소개했다. CNN 방송은 골든글로브가 <미나리>를 작품상 후보에서 배제한 것에 대해 “미국은 공용어가 없으며 인구의 20% 이상이 집에서 영어 이외의 언어를 사용한다”면서 “할리우드의 인종차별에 대해 심각하게 문제를 제기하게 했다”고 전했다. LA타임스는 HFPA 구성원의 인종 다양성 결여를 지적하기도 했다.

정 감독은 골든글로브 시상식 이틀 전 뉴욕타임스에 “이 모든 논란의 긍정적 측면이 있다면 우리가 기존 카테고리에 도전하는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이라면서도 “‘최우수작품상 후보에 내 자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말하긴 어렵다”고 국적 논란에 대한 입장을 에둘러 밝혔다.

지난해 1월 선댄스영화제에서 최초 공개된 영화 ‘미나리’의 주연 배우 한예리, 윤여정, 스티븐 연, 알란 김, 리 아이삭 정 감독과 노엘 조.(왼쪽부터) AP연합뉴스

■아카데미 수상 가능성은

골든글로브는 ‘미리 보는 아카데미(오스카)’로 불린다. 아카데미 투표 일정이 골든글로브 시상식 직후 진행되기 때문이다. 지난해 골든글로브에서 ‘외국어영화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도 같은 해 아카데미에서 4관왕을 차지했다. 이제 관심은 <미나리>의 아카데미 수상 가능성에 쏠린다. 할머니 순자로 열연한 윤여정의 여우조연상 후보 지명 가능성이 가장 높게 점쳐진다. 현재까지 윤여정이 받은 여우조연상은 미국 4대 비평가협회상으로 불리는 전미비평가협회상, LA비평가협회상을 비롯해 총 26개에 달한다.

미국 영화계는 이날 골든글로브 시상식을 시작으로 두 달간 ‘오스카 레이스’라 불리는 시상식 시즌에 들어간다. 미국 방송영화비평가협회의 ‘크리틱스 초이스 어워즈’(7일), 미국작가조합 시상식(21일), 제작자조합 시상식(24일), 배우조합 시상식(4월4일) 등이 예정돼 있다.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주요 부문 후보는 오는 15일 발표되고, 시상식은 다음달 25일 열린다.

심윤지 기자 sharps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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